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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사 어떻게 만들어졌나 (3)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01-09-15 00:00:00 2001.09.15 00:00:00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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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사와 관련해 김정진 시의원이 군산시 집행부를 상대로 질의한 지난 7월의 시의회 정례회 행정사무감사 발언 가운데 종전과 새로 제작한 시사간의 차이로 혼란스런 부분의 지적이 있었다. “군산시사는 정확한 내용을 담아야 하고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말아야 하다는 심정으로 제작하는 것이 옳다”라고 전제한 김 의원은 군산시사 내용상 오류에 대해 몇몇 사례를 밝혔다. 김 의원은 2000년판 군산시사 상, 하권 중 종전 시사와 동일한 내용 가운데 이름이 다르거나 날짜가 다른 부분, 내용이 변한 부분 등 십여군데에 대해 지적한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일부 집필·편집위원들은 군산시사 관련 결의문과 함께 작성한 반론문을 통해 「상하권 2,592쪽의 방대한 지면에서 불과 10군데의 오자가 나왔다는 것은 오히려 이 시사가 얼마만큼 교정에 심혈을 기울여 만든 책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준다」고 적었다. 일부 집필·편집위원들의 이같은 인식은 김 의원의 사례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김 의원은 발언은 전체 페이지 가운데 10여군데의 오자만 나왔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단순한 오자나 탈자를 배제하고, 내용이 종전과 동일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이름이나 날짜 등이 달라 지역역사를 기술한 시사로서 읽는 시민 등을 혼돈케 했다는 지적이었다. 그 실례로 김 의원이 제시한 사례중 몇 개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01년 군산시사 상권 제2편 역사 제7장 일제강점기의 군산 내용 가운데 군산3·1만세운동 주동자의 재판 판결문을 기록한 373쪽 19번째줄 후미부터 『피고 김종실에 대한 심문조서 가운데“자기는 이두열의 권유에 따라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3월5일 이두열 등이 체포되었을 때 학생들의 권유에 의하여 여럿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던 사실이 틀림없다”는 요지의 기재』란 부분이 있다. 우리 고장이 낳은 동일한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2000년판 시사에는「김종실」로 기록됐으나 1991년판 시사 동일내용에는「김준실」로 적혀있다. 이름이 이처럼 달라 잘못 알려질 우려가 크다. 또 381쪽 하단부 「임피시장의 만세시위」에서 『군산에 독립선언서가 들어오기는 2월28일이다. 서울에서는 3월1일에 일제히 궐기했지만 지방에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의거 날짜를 지방 형편에 따라 정할 수밖에 없었다. 옥구군 내에서는 3월6일에 만세시위가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1991년판 군산시사 동일내용에는 만세시위 일이 3월6일이 아닌 3월4일로 적혀 있어 어느 날에 만세시위가 있었는지 혼돈을 주기에 충분하다. 2001년판 군산시사 하권 제12편 제2장 문학 중 군산문학인협회를 기록한 내용 첫머리에『차칠선은 일제치하 후반기에 작품활동을 했다. 한 때 만주에서도 산 그는 19830년대 동요, 시조, 월간지 어린이, 신시조, 소년세계, 시조문학 등에 발표했다. 그가 발표한 작품은 50여편에 이른다.』로 돼있다. 그런데 1991년판 군산시사에는 동일 내용 동일 인물인 차칠선씨의 작품 수가 130편으로 기록돼 무려 80여편이나 차이를 보이고 있다. ] 10여년이 지난 후 오히려 작품 수가 줄어든 것이어서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다. 이처럼 군산지역의 역사를 혼돈스럽게 만들어 주는 시사 일부 내용들에 대해 김 의원은 집행부 관계자를 상대로 지난 7월 시의회 정례회 행정사무감사를 통해 시사를 배포하기전 문제점이 있으면 정오표라도 붙이는 성의라도 표시해야 했다며 질타를 가했다. <김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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