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옥같은 작품들로 현대 한국문학의 신기원을 개척하며 한국문단의 큰 별로 우뚝 선 고은 민족시인(69)이 3년여만에 지난 18일 고향 군산을 찾았다. 이번 고향 길은 전북세계소리축제의 성공을 기원하는「명사들의 릴레이콘서트」란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기차편을 이용 익산역에 도착해 군산으로 향하는 전군도로 상 승용차 안에서부터 군산시청 회의실 강단에 오르기 전까지 고은 시인이 들려준 고향생각을 느껴본다. <편집자주> 신 세기의 첫 가을. 맑은 햇살을 받으며 익산 역에 도착한 고은 시인은 마중나온 이복웅 후배 시인(군산문화원 부원장)을 발견하는 순간 오른 손을 번쩍 들어 짧게 반가움을 표했다. 군산으로 향하는 승용차에 몸을 실은 일행은 전군도로를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복웅 시인이 스웨덴에서 며칠있었는지를 묻자 고은 시인은 8일동안 스톡홀름대를 비롯 몇군데에서 자작시를 읽고 강연도 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답했다. “바로 어제(17일) 귀국해서 오늘 고향으로 내려왔지.” 작년 미국 하버드대 등 해외활동이 빈번하다는 말엔 “아, 너무 많아서 시방 문제가 많은데…, 내 작업을 해야 하는데 작업시간을 너무 많이 비어놓았어.” (영국에 거주하는 딸)차령이가 보고 싶겠다는 후배시인의 안부에는“유네스코 행사에 참여해 이태리와 불란서를 왔다갔다 했는데 그쪽이 방학이어서 이태리로 오라고 했지. (딸을)만나서 이태리 좀 돌아다니다가 영국으로 가서 며칠 있었고, 그렇게 눈맞추고 왔지 뭐.” 딸이 중학교 3학년이고 문학공부를 하는지의 물음에 벌써 고1이라고 밝힌 그는“한 인간이 돼서 잘 지내고, 문학쪽으로는 아닌 것 같아. 영화 쪽을 한다든가, 지 엄마가 영문학을 하니 영문학을 한다든가. 아무튼 복잡해요 잘 모르겠어”라고 근황을 설명해준다. 고은 시인은 지난 82년 현 중앙대 영문학과에 재직중인 이상화 교수와 결혼해 늦은 딸 차령이를 낳았었다. 고은 시인은 자신을 추켜세우려는 듯한 말을 하려하자 곧바로“코스모스 안 폈지?”라고 물으며 화제를 바꿨다. 굳이 그에 관한 문학이야기 등은 너무도 유명하고 잘 알려져 있어서 미사여구를 사용할 필요성은 이미 차단된 상태임을 느끼게 했다. 그는 (군산대 전 교수)고헌 선생의 안부를 물었고, 몸이 안 좋아 전주 아들집에서 산다는 후배 시인의 말에 잠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야기는 이복웅 후배시인이 최근 지명연구에 심취해 있음으로 다시 시작됐다. 육두로 이어온 지명에 대해 문헌을 제시해오고 있고 미룡동 용둔리(고은 시인의 고향마을 지명) 근처 개정지, 용처, 채터, 함박골, 절뫼 등도 다 찾아 놓았다고 하자 “우리 집이 있었던 곳은 쇠정지다”라며 정겹게 웃었다. 소가 정지하는 곳이란 뜻을 지녔는데 오래 전부터 국기게양대가 있었다는 설명에 흥겨움이 가득차 있엇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는 아파트가 수천세대 가득들어 있어 잘 못찾고 집 바로 옆으로(군산-전주간)고속화도로가 나버렸다는 설명에 깊은 감회어린 표정을 보였다. “이게 전군도로지? 오산 지났나? 벚꽃이 많이 상했네. 아이고…. 다 시들어 가는 것 같은데?” 나무가 많이 없어졌음을 아쉬워한 그는 이제 곧 군산-전주간 고속화도로가 새로 전주에서 내초도까지 생긴다는 말에 놀라움을 표했다. 고향에 (아는)사람이 없으면 고향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후배시인의 말에 동의한 그는 “고향은 사람이야. 사람…. 아무래도 사람이 없으면 발걸음이 뜸해지지.”라며 고향의 의미를 잘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오는 27일 서해안고속도로 군산-인천 구간이 개통되고, 군-장간 철도가 연결되고 있다는 소식에 앞으로 익산신세 안지고 곧바로 고향에 오게됐다며 반색을 했다. 그는 도로상의 「호원대학교」라는 이정표를 보며 물었고, 옛 백화 강정준 회장이 세웠으며 지난해 작고했다는 소식에 아쉬워했다. 이어 이종록 선생을 근황을 물어 군장대학 학장으로 일한다는 말에 옛 기억을 떠올렸다. “군중 때 나를 가르치셨고, 또 난리통에 난 군중 4학년을 중퇴했었는데 나중에 나를 그분이 교사로 특별채용해서 당시 북중학교 교사생활도 했었지. 그 때는 그런 것이 있었어.” 대야검문소 주변을 지나며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등으로 많은 변화를 보이는 곳에 시선을 한참 머물던 그는 여기 “옥구중학교 숙직실에서 옛날 하루 신세진 적이 있었다”고 말했고 근처에 홍건직 선생 묘소를 떠올리며 몇몇 문인들의 이모저모를 후배시인과 주고받았다. 군산에서 전주까지 철도를 따라 걸어간 적이 있다는 그는 “뭣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라고 독백했다. 개정병원 앞 도로를 지날 때는 이주환씨의 소식을 궁금해하며, 뜻모를, 후배시인과의 소설 따로 없는 순정이야기로 박장대소 속에 이미 고향 깊숙한 품으로 젖어든 그를 볼 수 있었다. 개정병원이 수년째 영업을 못하고 있다는 말에 관심 깊게 원인 등을 묻고는 그 좋은 병원이 빨리 해결돼 다시 예전처럼 사랑이 가득한 병원으로 돌아가애 한다며 염려의 혀를 찼다. 옛 조촌동 변전소 자리를 돌아 「성미식당」이란 전통의 생선탕 집에 들러 점심을 한 고은 시인은 대구탕 맛이 아주 시원하다며“이맛이 다른 곳엔 없어. 참으로 눈물겨운 음식이야. 이 게장 맛좀 봐 기가막히네”등의 고향 음식 예찬을 끊임없이 이어갔고 세 차례나 게장을 시켜 들었다. 반주로 두산주류BG군산공장이 생산하는 「군주」를 처음 맛보고는 기막히게 좋은 술이라며 애용할 뜻이 밝혔다. 고향음식을 맛보면서도 후배시인과 문인들의 소식을 주고받는 이야기는 끊임없었다. 음식 맛이 아주 좋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던 그는 음식 맛이야 이 식당이 명인수준이라고 하자 그 「명인」들에 대해 취재해서 글을 올려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바삐 식사를 마친 그가 군산시청 시장실에 들어선 시각은 오후 1시50분경. 군산중학교 1년 선배인 강근호 시장을 만나며 감격의 포웅을 나눴다. 실로 51년만의 상면이라는 선후배는 그동안 그토록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도 서로의 소식은 끝없이 들었지만 1950년 난리통에 헤어진지 장장 반세기를 넘어 상면하니 감계무량함으로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중학시절 그토록 엄하고 싸나웠던 선배가 시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다고 말했다. 강 시장이 건강을 묻자 외국여행을 그렇게 많이해도 시차를 모르니 건강한 것 같다며, 실제로 작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강연하다보니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는 버클리대학에서도 와 달라고 해 미국에서 있는 동안 동부와 서부를, 얼마전 미국 테러사건에 이용됐던 그 비행노선을, 50여차례 거뜬하게 왔다갔다했다고 설명했다. 오랜 만남의 기쁨은 강연시간으로 잠시 중단됐고, 저녁만찬에 강시장이 초대해 다시 이야기를 잇기로한 그는 강시장과 함께 강연장인 군산시청 대회의실로 향했다. 고향을 방문한 고은 민족시인이 후배시인과 정담을 나누고 선배와 반세기 넘어 해후하는 모습을 지켜본 90여분간의 시간은 속절없이 너무 빠르게 흘렀다. 언젠가는 고향에 내려와 머물고 싶다며 스쳐지나듯 내던진 그의 말을 놓치지 않았기에 아쉬움을 기대감으로 덮어본다. 오늘(18일)과 같이 좋은 가을날 고향에서 생활하며 후배 문학도들에게 숱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는 고은 시인의 모습을 성급하게 그려보며…. <김석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