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목을 넓고 얇게 깎은 단판을 섬유방향이 서로 직교되도록 접착제조한 목질인 합판은 천연소재로서 절삭, 굽힘, 접합 등 가공성이 뛰어나고 미관 및 감촉성이 뛰어나 과거부터 현대까지 건축용, 가구, 운동구 등에 널리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합판제조산업은 1936년 조선목재공업을 효시로 출발해 해방 후 청구목재(1946), 광명목재(1946) 등 대량 생산체제를 갖춘 공장들이 가동됨에 따라 조금씩 조명되기 시작했다. 6․25전쟁 이후 전후복구사업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건설용 자재 수요가 폭등했고 이에 합판을 대량생산하며 본격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근‧현대 합판제조산업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인 경암 고판남 회장(1912~1998)은 군산시 성산면 출신으로 부친 고채호 씨와 모친 김여아 씨 사이 2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화강상사에 취업해 이후 1941년 29세에는 본인의 첫 사업인 삼남정미소를 창업했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청구목재를 사들여 대표로 지내며 회사를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1953년 성냥 공장인 배달 산업을 인수했다.하지만 196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주력 수출품이던 합판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고 예상한 고 회장은 1962년에 회사 업종을 합판 제조업으로 전환해 경암동에 ‘한국 합판’을 설립한다.
이후 ‘저소득→저저축→저투자→저소득’이라는 경제적 악순환을 끊고 산업 불균형적 성장 억제 및 공업화 기반 구축을 통한 자립경제 형성을 목표로 한 경제개발 정책(박정희)이 실시되는 와중, 합판이 수출 특화 산업으로 지정되며 국내 합판 산업은 연평균 30% 이상의 고속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고 회장은 1968년에는 만경강 하구 간척산업을 통해 180만평, 길이 5km에 달하는 염전을 일궈내고 이후 1973년 삼성을 제치고 경영난을 겪던 고려제지를 인수해 전국 최고의 신문용지 업체가 되는 세대제지를 탄생시키는 등 손대는 사업마다 대박을 터트리며 사업계의 ‘미다스의 손’임을 증명했다.
이후 1984년까지 ‘한국합판’은 한해 수출액 30억불을 돌파하는 등 초활황 경기를 구가했다. 당시 ‘한국합판’은 사원만 2천여 명이 넘었으며, 군산경제 활성화 뿐 만 아니라 ‘한국합판’입사를 희망하는 전북지역의 꿈 많은 젊은이들을 대거 고용해 지역의 고용창출에도 큰 기여를 했다.
이외에도 고 회장은 지역인재 양성을 위해 1975년 개정간호대학과 군산제일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세대 문화 재단을 설립해 장학금을 수여하며 지역꿈나무인 학생들이 꿈의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하는 나침판 역할을 해줬다.
하지만 1985년 이후 합판 산업이 사양화의 길에 들어서자 한국합판과 세대제지를 합병해 세풍제지를 설립한다. 이후 신문 용지 사업에서 2위를 기록하는 등 사세를 확장시켜 세풍 그룹으로 발전시켰으나 1990년대에 제지 부문을 제외 하고는 별다른 흑자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결국 IMF 구제 금융 체제 돌입으로 인해 회사들이 모두 파산 및 워크아웃(Workout) 상태가 되며 그룹이 공중 분해됐다.
대기업 총수이자, 1981년 제11대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이자, 24년간 군산 상공 회의소 회장을 맡은 고 회장은 평소 청색 작업복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할 정도로 검소하고 겸손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는 애향심 깊은 군산 지역의 선각자로 회자되고 있다.
김중규 근대역사박물관장은 이번 기획전을 준비하며 “50~60대의 근대사 산업이 만들어 놓은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에 현재 경제가 있을 수 있다”며 “어느 기업이라도 영원할 순 없다. 중요한건 존재하는 동안에 사회·경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많은 사람들이 50~60년대 근대 산업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 아쉬워 이번 기획전을 준비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