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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소년병 엄마의 눈물은 -

가슴 아린사연으로 얼룩진 6.25전쟁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19-07-01 15:45:53 2019.07.01 15:45:53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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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 소년병을 참혹한 전쟁터로 보낸 엄마의 눈물은 오늘도 강물처럼 흐른다. 어린 아들을 기다리며 행여 돌아오는가? 문밖에서 기다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6.25전쟁을 어찌 잊을 수 있는가?

 현충일이면 시신도 없이 묘비만 서있는 군산 군경묘소를 찾아 아들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를 끌어안고 흘리시던 어머님의 눈물- 지금도 형제들 가슴에 멍울이 되어 깊게 파고든다.

6.25전쟁 1950년, 그날 군산 시가지 모습은 오전까지 일요일 한가한 휴일의 평화로움이 담겨있었다. 오후 3시경 군산경찰서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화재사고가 났는가? 해서 경찰서 앞으로 가는 도중에 동네에 사시는 경찰관 아저씨(중 2학년 때)를 만났다.

“어디서 불이 났습니까?” 물었다. “아니다. 북괴군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짧은 답변을 하시며 빠르게 경찰서로 향해 가셨다. 초등학교 시절 8.15 광복 전에 외가댁으로 피난했던 경험이 있어 전쟁이 났으면 또 피난을 가야하나 걱정이 돼서 집으로 돌아왔다.

북한의 남침전쟁은 정말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한국군은 전사자 41만5,004명과 희생자 131만2,836명 미국군인은 전사자 3만3,665명을 포함, 총 3만6,940명의 희생자를 냈다. UN군은 전사자 3,094명을 포함한 1만6,532명이 희생됐다.

아군의 희생자가 이렇게 많은데 남침을 했던 북한군과 늦게 참전했던 중공군은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인한 희생자 등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천문학적인 수치를 예상케 한다.

당시 전쟁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1950년대 하반기 서부전선에 갔을 때 UN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는 산은 그때에도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어느 개인 참호에는 중국제(상해운동화)운동화를 신은 유골이 그대로 방치돼 있어 전쟁의 참상을 표출하고 있었다.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면*

그날 이후 69년이 지났지만 상흔의 역사는 이대로 지울 수가 없다. 남침을 주도했던 전범의 진정을 담은 사과가 있어야 마땅하고 용서와 화해로 가는 길을 선택해야 순리다. 평화로 다가가는 목표의 실현은 다양하지만 상식을 존중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진정한 동력이 우선이다.

동구권 통일의 사례를 보면 문화교류를 우선하고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래서 서구권에 사는 사람들은 문화교류와 “핫도그(hot dog)”였다고 간단한 표현을 했다.

평화통일은 누구나 바라는 과제다. 6.25 당시 북한은 탱크를 내세웠다. 이제 없애야 할 것은 대량인명살상용 핵을 버려야 한다. 권력유지를 위해 핵을 계속 들고 있다면 상대의 굴복을 의미할 수도 있기에 난제가 풀리기 보다는 더욱 꼬여갈 뿐이다.

인간은 이념이나 특정사상을 떠나서 70년 이상을 서로가 다른 방식으로 생활을 했다면 화합은 상당한 기간을 통한 교류가 선행돼야 합리적으로 이뤄 질수 있다. 문화인류학에도 그런 내용이 담겨있다. 그러기에 상식을 존중하자는 용어를 새삼 강조한다.

6.25전쟁, 돌아오지 않는 소년병아들을 생각하며 흘리시는 엄마의 눈물을 떠올리며 평화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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