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지식의 문제는 인식론의 중심 과제이다. 곧 인식한다는 것은 ‘앎’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감성에 의하여 생성의 세계가 묘사될 때, 이성에 의하여 아이디어 세계의 묘사인 ‘진지(眞知)’를 나타내는 과정에서 감성이 아닌 이성의 힘으로써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사고의 경지를 가리킨다.
인간 세상에서 발전 원동력이 되는 ‘知’란 세상을 이끌어 가는 활력 에너지로서 섬광처럼 빛나는 지혜의 세계가 됨에서, 또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앎’을 익혀나가면 새로운 삶을 시작 할 수 있으며, 사고력을 키워 내는 창조성의 원천이 되는 지적 호기심에 의한 지식의 축적 공간은 배움 즉 교육에 의해서 이룩된다.
광의의 지식(intellect)에서는 지성이란 감각적 지각능력을 포함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며, 협의로는 知, 情, 意 중의 지적 능력을 가리키는 감정으로서 의지와 다른 사물을 개념적으로 사고하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며 판정하는 오성적 능력으로서 자유로운 것이나 특수 계층의 미적 감상이나 일부 학자의 전유물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능력이다.
헌데 근대 이래로 사고력을 인간의 지성 쪽에 중심을 두고, 사리 판단을 인간 지성에 합치되는 ‘眞’으로서 인식하지만, 실용주의 철학에선 인간의 지성을 한낱 동물이 지닌 지능의 연장 일뿐,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라고 한 <메이어>는 지성적 사고 기능이란 목적 지향적이며 비 지향적인인 문제해결 능력이라고 했다.
하지만 <비스 캔 스타인>은 지성이란 미래에의 선견력과 통찰력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지성적인 상상 작용에 이성적인 사고 작용 속에 어떤 한 장면을 상정하고 취사선택 하는 탐구력의 전체적인 구상으로서 확장시키며 새롭고 독창적인 사고로의 창조성을 발현하는 과정이라 고 했다.
여기에 <칸트>는 이성(reason)이 위에 군림하고 경험의 축적으로 추정되는 과정이라고 하면서 지성이란 <해보는 것> 이를테면 ‘to try’ 또는 ‘test’로서 위험과 고난의 의미를 지닌 노력 원리에서 지고한 학이 불염 (學而 不厭)이 요구되는 사고 즉 ‘같음과 다름’이 공존하는 유능한 ‘창조의 세계’라고 보았다.
그렇다. 이제, 결론으로서 지식이란 어떤 대상을 연구하면서 배우거나 또는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명확한 인식들의 이해이며, 더 나아가 지혜는 인격과 결부되어 있는 실천적 지식이고, 지성이란 지각된 것을 통일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인식을 형성되는 정신 작용 과정에서 얻어지는 결과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사고에 의한 이성이 지성을 소유하며 인간의 탐구력으로서 고등사고 기능을 의미하는 것, 예컨대 ‘추론, 판단, 비교, 적용’ 등과 같은 단순한 기억을 넘어선 요소 사고로서의 수렴적 사고가 아닌 확산적 사고 능력을 통해 그 기능들이 일어난다는 점으로서 이해하면 되겠다.
하니까 지식 위에 내가 살고 있을 땐, 절대적인 가치가 발휘되면서 사는 삶이라 할 수 있겠고, 그러므로 ‘나’란 영원한 이 순간 위에 살아가는 생각하는 한 존재로서, 또한 선택과 필연적 관계의 한 개체로서 살아있는 ‘숨결’의 실체로서 생명체를 구동케 하는 에너지의 힘 이것을 곧 ‘지식의 세계’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올바른 지성문화가 제 구실을 하고, 지성적인 삶의 근간에 기쁨을 누리게 할 이 사회 의 주역들 모두는(지성인, 사회 지도 층, 오피니언 리더) 사려 깊은 사색과 함께 지행일체(知行一體)를 행하는 삶을 통해 뼈를 깎는 자성과 인내로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공감능력(연민술)의 훈련을 시시때때로 행해야 할 것이리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어떠한 유기체보다도 더 이기적이고 지성적(대뇌 피질)인 동력으로써 행동을 수행하며 합리성을 뛰어 넘어 서서 비합리적인 행동을 가능케 하는 ‘공감성’을 지닌 사색하는 유동적 존재이기 때문에서이라 하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