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차형근 의원선서 후 공화당 제명
차형근은 제7대 국회의원 당선자로서 7월 개원식 참석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차형근은 의원선서를 마친 후 민주공화당에서 제명을 당하는 정치적 비운을 맞았다.
7대 국회는 부정선거로 국회가 교착상태에 빠져있어 시국수습이 선결과제였다.
결국 수습의 일환으로 전국적인 정치문제화 되어있는 군산 신민당 당사난입사건의 부정선거 당사자인 차형근을 민주공화당으로서는 당적을 보유할 수가 없다는 판단아래 결국 제명이라는 최악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차형근은 군산. 옥구 출신의 국회의원이기는 하나 부정선거로 당선된 국회의원이라는 멍에를 걸머지고 있어 의정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부정선거에 동의하고 불법선거를 저지른 지역으로 낙인이 찍힌 군산은 과연 역사적 평가를 어떻게 받을 것인지 깊은 성찰을 통해 공명선거가 무엇을 보여주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자주국민에게 커다란 『추』하나를 던진 것이다.
당시 알려진 바로는 4년 동안 무소속 국회의원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의정보고한번 제대로 못하고 임기를 마쳤으며 군산을 내려와도 특정 지어지는 몇 사람만 만나는 정도였다니 얼마나 치욕과 수치스러움을 군산. 옥구 주민들에게 평생 풀 수 없는 멍에를 안겨준 것인가.
이러함은 차형근 의원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선거에 참여한 모든 유권자들에게도 그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선거에서의 공명선거는 개인의 명예가 문제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한다. 얼마나 큰 경종을 울린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나의 젊은 의혈정신은 차형근을 국회의원으로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67년 한 해를 넘긴 뒤 다음해에 ‘더는 소송을 진행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아래 김판술 선생(1909-2009 군산 출신)은 부정선거와 관련한 모든 소송을 취하해 주었다.
“나의 부덕한 소치”라는 겸허한 생각으로 소송을 취하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국안정이라는 변화추구로 나는 받아들였다. 6.8부정선가라는 오명의 역사는 뒤안길로 사라지고 김판술 선생은 “김군에게 대단히 미안하다”며 “좋은 직장을 구하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이로써 김판술 선생과의 헤어짐도 6.8부정선거도 모두 저버리고 밥벌이가 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67년의 6.8선거와 관련하여 김판술 선생과의 인연은 마음에 깊이 담아두고 1년여 가깝게 옆에서 선생의 말씀과 처신, 언행 등 그리고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실 가닥만큼 익힌 것 또한 빼 놓을 수 없다.
이제는 새로운 인생의 좌표를 설정해야하는 입장에서 선생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치를 배우고 꿈을 키우며 살아갈 희망 이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꿈도 부풀었으나 일단 접어두고 생활전선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현실문제인 취직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정치인이 되어야지 하는 마음은 굳은 심지로 정해놓고 이에 걸 맞는 직장을 찾기로 했다.
그렇지만 짧은 기간에도 군산 신민당 당사난입사건에서 마이크잡고 부정선거 외쳐댄 함성과 부정선거 자료수집, 김판술 선생을 모시면서 배운 인생철학, 군산에서 많은 지인들의 모습 등 헤아릴 수 없는 사회초년생으로서의 발자국이 남아 어린 거린다.
특히 부족한 나를 가까이에서 지켜봐주신 백효기 여사를 잊을 수가 없다. 백 여사는 나에게 배우자를 선택해주시려는 결심을 피력하신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