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중국 어뢰정 사건2
<외교채널로 양국 합의 공해상에서 어뢰정 인계>
어뢰정 승조원들은 구조된 지 6일 만인 28일 오전 11시 양국의 중간지점인 공해상(위도36N·경도124E)에서 3213호 어뢰정과 사망한 승조원의 시신, 생존 승조원 전원을 중국 해군에 인계했다. 이로써 중국 어뢰정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양국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중국정부는 3213호 어뢰정을 회수할 함대를 급파함과 동시 3월 22일 오후 5시경 신화사 통신 외신부 쓰투창을 영국령 홍콩주재 한국영사관에 보내 구조협조를 요청한다.
우리 측 정부는 해군에 이 사실을 전파, 해군은 즉각 작전 중인 전 함정에 긴급전보로 구조지시를 타전한다.
3213호 어뢰정이 미수교국인 중국함정인 점을 중시하여 표류해역을 전담하는 해군 제3해역사령부(당시 사령관 해군소장 권정식 제독)는 예하 해역 함정을 동원토록 한다. 해군은 어뢰정 승조원들에게 무장해제는 물론, 안정을 시켰다.
당시 중국은 3.900톤급 구축함, 전투함 2척 1.500톤급 예인함을 동원하고 우리 해군은 23일 새벽 06시 50분경 하왕등도 근해에 집결 중인 동해급 초계함, 수원함과 백두급 유도탄 고속함 PGM61 등의 해군함정과 대치한다.
우리 해군은 계속 함정 증원하며 중국 함대에게 한국영해에서 즉각 퇴거를 요구했으나 순응하지 않아 전투기를 출격하는 등 잠시 긴장된 분위기였다.
우리정부는 관계 장관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우리 해군의 퇴거요구와 미국대사관이 베이징으로 중계한 한국정부의 강력한 의사전달이 되어 당일 09시 30분경 중국측 함정들이 해역 밖으로 물러났다.
한국정부는 외무부 대변인을 통해 중국의 한국영해 침범에 대한 엄중한 항의 성명을 발표한다. 당일 밤 10시 홍콩주재 한국 총영사가 신화사 홍콩지사 외신부장에게 한국정부의 항의각서를 전달한다.
이에 중국정부는 자신들의 부주의로 인해 한국영해 침범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와 관련한 교섭을 신화사 통신 지사를 통해 진행한다. 3일 뒤인 26일 중국 측은 공식적인 사과각서를 우리 정부에 전달한다.
우리 정부는 이 사과문을 수용, 2일 후인 3월 28일 오전 11시에 공해상에서 인계절차를 마쳤다.
인계과정에서 어뢰정의 예인은 군산항 부두에서부터 해양경찰 소속 경비정 258호(군산해경)가 맡았으며 인계대표로 관련서류에도 서명을 했다. 중국해군은 북해함대 참모장이 서명했다.
중국 어뢰정 사건은 세계적인 관심 속에서 1주일 만에 일단락되었다. 연합통신에 따르면 주범 두 명은 반역죄와 살인죄를 적용, 재판을 거쳐 총살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군산 해역에서 발생한 중국어뢰정 사건은 1주일 동안 내외신 기자들의 취재전쟁이 벌어졌으며 이들의 숙소인 군산호텔은 삼엄한 경비에 만전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27일 오후부터 긴급 상황이 벌어지면서 국내 지방기자는 전북일보 김철규 부장이 풀기자(다른 신문사 보도자료 제공)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고 군산 외항으로 달려갔다.
어뢰정 예인선은 해경 258호 경비정이지만 이와는 별도로 내외신 기자 40여명은 해군함정 1만 톤급인 충북호에 승선했다. 물론, 나도 충북호에 승선했다.
밤샘을 한 뒤 새벽에 선상에 올라가니 우리가 탄 함정 뒤에는 4-5척의 작은 함정과 상공에는 헬리콥터가 선회를 하고 있다. 공해에 이르자 중국 측은 포신에 카버를 씌운 쇄빙선에 예인할 작은 함정 한 척과 함께 나타났다.
약 3시간에 걸쳐 해상 국제통신방법으로 교신한 끝에 1백m 간격을 두고 우리 작은 함정으로 예인한 어뢰정과 승조원 등 모두 인계를 마쳤다.
통신 교섭 과정이 우리는 30분 소요되면 중국은 1시간 소요되는 것을 보고 반도국가와 중공이란 대국과의 차이점을 실감했다. 국제적인 사건 현장을 지켜본 나는 기자란 어떤 존재인가를 더욱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