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이리역(현 익산) 폭발사건2<공포의 암흑가>
공포의 암흑가로 만든 이리역 폭발사고는 사망자 59명, 부상자 1,343명, 가옥 전파 675동, 반파 1,289동, 경파 7,566동, 건물 9,536동 파괴로 이리시 총 가구 1만3,362동의 71.3%에 이르러 총 재산피해는 무려 51억원으로 추계했으나 실제 피해액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했다.
사고 발생 2일 후인 13일에 중앙조사반이 현지에 내려와 조사한 결과, 공공 시설물만도 40억400여만원이라고 밝혔다. 이리세무서, 금융기관, 교육기관, 철도 피해 등 공공시설물 대부분이 파괴됐다.
피해지역을 확인하려는 도중 폭발열차가 머무른 곳에 깊이 15m, 직경 30m의 웅덩이가 보였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주검과 상처투성이의 모습은 가히 전장터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참상이다. 신음과 통곡의 상황은 한마디로 암흑속의 처참한 참혹함이다.
피해지역은 이리역을 중심으로 중앙로, 창인동, 모현동, 송학동, 남중동, 인화동, 갈산동 등 집 더미에 깔려 숨진 채로, 사람 살려 등 외마디 비명소리는 허공에 날리는 듯 했다.
특히 비교적 허술한 창인동 일대의 적선가옥이 대부분으로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파도가 휩쓸고 간 쓰나미 현상 같았다.
중앙로 등 주요도로는 상가의 깨진 유리조각으로 뒤 덮여있어 사람이 다닐 수가 없을 정도이다.
특히 이리역에서 200여m 거리에 있는 삼남극장에서는 하춘화 데뷔16주년 기념 리사이틀이 때마침 9시부터 시작됐다.
이주일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관객이 700여명으로 공연시작 15분 만에 극장 천장이 무너지는 참극이 벌어졌다.
공연 중 쏟아진 천장에 관객은 물론, 하춘화도 짓눌린 상황을 옆에서 목격한 이주일 등에 업혀 간신히 밖으로 빠져나와 가벼운 상처만 입고 치료를 받았다.
이주일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다.
이 사고로 관객 6명이 압사했다. 당시 폭발음은 이리시가지를 벗어나 군산, 김제, 황등 등 반경 20~30km까지 지진이 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이토록 이리역 폭발사고는 우리나라 화약폭발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신 씨는 결국 취재진에 의해 발견되어 경찰에 인계됐다.
대합실을 빠져나간 신 씨는 사고 현장 암흑가를 맴돌다가 적발되어 경찰조사에 발화되기까지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검찰 군산 지청에서 법원에 넘겨져 재판을 받게 된다.
군산지청 이재신 검사는 신무일 피고인에게 미필적 고의에 의한 폭발물 파열 및 과실치사상죄를 적용, 무기형을 구형한다.
그 후 신무일 피고는 최종 선고공판에서 10년형이 확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절망에 빠진 이리시를 과연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이 쉽게 세워지지 않고 당장 이재민들에 대한 구제책이 급선무였다.
나는 지금부터가 문제라며 ‘새 이리 건설을 하자’는 구호로 전북일보 1면 머리기사로 제안을 했다.
당시 채의석 이리시장은 이를 받아들이고 도와 중앙에 보고한 뒤 이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라는 마음으로 ‘새 이리 건설을 하자’는 것이다.
악몽에서 벗어난 지 1년여가 되면서 새로운 모습의 이리가 건설되어가고 있다. 이로 인해 이리시내에 있던 익산군청은 함열로 이전을 했고 이리시는 오늘의 현대적인 익산시로 변모를 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는 이리시 재건에 이재민 구호, 이재민 취로사업, 아파트 건설 등 최대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화약열차운행에 따른 철도당국의 부조리에 의한 사고가 아니냐”는 이리시민들의 질책과 분노의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리역 폭발사고 현장을 생각하면 대형사고 현장취재경험과 역시 ‘유비무환’의 중요성을 실감하면서 오늘의 익산시를 가면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