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사회부 기자의 예리함은 생명이다 2<진범이 뒤바뀐 살인사건>
김시훈 사건은 처음부터 수사 방향이 틀렸다.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위험천만한 수사 방식이다.
수사절차와 방식에 0.001%만 방향을 잘못 잡아도 멀쩡한 사람을 억울하게 옥살이를 시키기 때문이다.
수사는 수사 과정에서 수사결과물을 단정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하는 것이다.
어느 범죄 혐의도 무죄 추정을 전제로 수사 진행을 해야 함에도 혐의자를 범죄인으로 단정해놓고 거기에 맞추는 수사 방식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일반 혐의자나 특히 정치인에 대한 혐의도 미리 범죄인으로 간주하고 수사결과물을 조작해 내놓는 결과를 우리는 그동안 보아왔다.
김시훈 사건은 앞에서 밝힌 대로 1981년 6월 24일 밤 11시경 전주시 효자동 자림원 앞 고추밭에서 전신에 30여 군데를 예리한 흉기로 난자를 하여 숨지게 한 살인사건이다. 자림원에 수사본부를 차린 경찰은 전주지검 당시 신 모 검사 지휘 아래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모든 사건은 현장 취재와 주변을 잘 살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화재나 살인사건의 경우 대체적으로 범인이 반드시 몇 시간 후 아니면, 다음날에도 수사 진행을 보기 위해 현장 어느 한쪽 구석에서라도 보고 가는 경향이 있다.
이 사건의 경우도 그를 살필 필요가 있으나 인근 전주대학교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인부일 것이라는 추측들이다. 강도 살인으로 추리를 하고 있다.
문제는 피해자가 이 동네에서 사는 인쇄공으로 20세 나이인데 저항을 못 하고 일방적으로 난자당했다는 점에서 강도 살인으로 본 것이다.
사건 발생 18일 만인 7월 12일 전주대 신축공사현장 인부 김시훈(30·대전) 씨를 충북 벌목 공사장에서 검거해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고 경찰은 공식발표를 했다.
김 씨는 전주대 공사장에서 공사장 감독으로부터 말썽을 자주 부린다는 질책을 받아 이에 격분하여 탁주 4병을 마시고 공사장에서 1km 거리인 고갯길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자백을 받았다는 것이다.
경찰에 살인혐의로 구속된 김 씨를 전주경찰서 지하 형사실에서 만났다.
김 씨가 말을 하려 하지 않아 전북일보 출입 기자라고 밝히자 나한테 솔직히 말해주면 구제가 될 수도 있다는 말에 순순히 수사 과정을 털어놓았다. 옷을 벗어 고문당한 사실을 보이며 “나는 절대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먹고살기 위해 공사판을 돌아다닐 뿐”이라며 억울해서 못살겠다”고 눈물을 쏟아냈다.
다음날 김 씨의 고문 사실을 폭로기사로 취급했다. 이 기사가 나간 후 경찰과 검찰이 난리가 났다. 허위 과장 보도라고…. 결국 경찰은 구속송치 했으며 전주지검 신 모 검사도 역시 살인죄를 적용, 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이 사건 재판부는 증거불충분과 강압 수사를 들어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의 당연한 항소로 광주고등법원에서는 징역 15년의 유죄판결을 선고했다.
1심과 2심에서의 김시훈은 운명이 달라졌다. 김 씨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재판장님 나는 절대로 살인을 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대법원은 피고인의 운명을 가르는 판결이기에 선고 기일을 정해놓고 있는 과정이다. 김 씨는 운명이, 그리고 억울함이 풀릴지 선고날 만을 기다리고 있는 심정이다.
선고 3일을 남겨놓고 당시 1987년 이리경찰서에서 70대 노파를 강간 살인한 전과 3범을 진범으로 검거했다.
이로써 김시훈은 14개월의 억울한 옥살이를 끝으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아 석방되었으나, 경찰의 가혹한 고문으로 성불구자가 되었음은 물론, 석방 후에는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의 가혹한 고문은 한 인간을 억울한 늪으로 몰아넣은 꼴이 됐다. 형사범이든 정치범이든 인권을 담보로 수사를 해야 하는 커다란 경종을 울린 사건이다.
김시훈 사건으로 신 검사는 경남 시골 지청으로 좌천되고 전북경찰청 형사계장, 전주경찰서 수사과장, 형사계장, 고문형사 등 7명이 파면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