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회 전북일보를 떠나면서
사회의 첫발이요 청춘을 불태운 전북일보. 1968년 8월 전북일보 1면에 김철규 편집국 기자 사령이 발표됐다.
전북일보를 붙잡고 사령을 몇 번이고 쳐다보았다. 신문기자가 되겠다는 꿈이 이뤄진 것이다. 그것도 전북의 가장 대표적인 유력지 전북일보이기 때문이다. 전북도 내 다른 신문에 비교우위를 차지하는 신문이라는 데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첫 출입처는 체신관서 등 통신 분야였으나 몇 개월 지나면서 경찰 출입기자로 출입처가 바뀌었다.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배워야 함은 물론, 일정한 사회경력이 절대적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최소한 10년 정도 경력으로 정계에 진출하면 좋겠다는 계획 아래, 최선을 다하는 기자역량을 발휘했다. 드디어는 사건 캡이 되고 경찰에서 법조로 출입처가 옮겨지는가 하면, 대학에서 전공한 법률의 실습을 하는 심정으로 법조 출입기자로서의 역량을 쏟았다.
경찰 출입할 때는 잠바차림이지만 법조출입은 정장차림으로 출입처에 따라 옷차림이 달라진다. 10여 년에 가까운 세월 법조출입하면서 진정 사회의 다양성을 취재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서정상 박사(사장)의 총애는 잊을 수 없다. 3사 통합으로 인한 법정다툼에 온갖 심부름을 아끼지 않은 결과 결국 화해로 끝을 맺었다. 이 가운데는 김철규 사회부장이 존재했다. 쾌거였다.
경찰에서 놓친 사건을 검찰에서 체크해 주요사건을 빠트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어언 14년이 넘어가 중견기자가 되어 드디어는 1982년 부장으로 승진, 첫 부임지가 군산취재부장으로 오게 됐다.
약 1년 근무하면서 내가 최초로 주창한 새만금 사업이 최고의 관심사였다. 특히 정치준비를 하면서 현직에 있으면서 1990년 사비 500만원의 용역비를 들여 이해 11월 새만금과 군.옥지역 개발에 따르는 대토론회를 KBS 군산방송국 공개홀에서 개최했다.
발제에 나선 나는 이 토론회에서 국제항만, 국제공항, 첨단과학단지, 벨트형 국제 관광단지조성 등 4대 사업을 제시했다. 이 사업은 현재 새만금개발청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업들이다.
또 한 가지는 당시 본사 이치백 편집국장의 제안으로 군산월명공원에 채만식 문학비를 조성하자는 계획이다. 채만식 문학비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재정문제 조성에 따른 갖가지 지원 심부름에 최선을 다했다.
태양이 내리쪼이는 8월에 문인들은 물론, 군산 시내 각급 기관단체장들이 참석, 백릉 채만식 소설가 문학비 제막식을 축하했다. 문학비 뒷면에는 추진위원들의 명단 속에 취재부장 김철규 이름도 새겨져 있다.
1년 후에는 본사 사회부장으로 부임을 한다. 당시 1도 1사에 따라 전북에는 전북일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사회부장으로서는 중 차 대한 책임 있는 자리이다.
검은 것도 희다면 흰 것이 되기 때문에 기사에 비중과 명쾌한 판단을 요구하는 절대적인 데스크다. 지방지에서는 당시로서는 사회부장이 아주 중요한 자리다.
편집부국장으로 승진하면서부터는 책임이 더욱 무거워졌다.
내·외근 담당하는 부국장이 있으나 나는 내근담당 부국장이다. 논설위원이 되면서는 전북일보의 주장을 내세우는 사설과 칼럼을 써야 한다.
그러나 그해 8월 정치집회 사회를 본 것이 문제가 되어 사표를 냈다. 이즈음 해서는 주말이면 군산에 와서 선거에 따른 조직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젊음을 다 바친 청춘과 인생이라는 세월을 생각하면 혹시 기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는지 또는 얼마나 사회와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었는지, 즉 사회의 정의와 자유와 평등에 이바지를 다 했는지 등 내 인생의 제1막을 내리는데 어떤 아쉬움이 있는가가 머리에 남아 맴돌았지만, 새로운 제2막의 정치 인생의 장을 열어간다는 데서 시원섭섭함도 없지 않았다. 인생 초장에 결심한 로드맵에 의해 진행하는 것으로 신문기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과정이다.
지금도 언론인은 역사적 사명을 띠고 살아 숨 쉬는 생물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생명이 숨 쉬고 있는 동안은 마음에 간직하는 전북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