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이 공부도 시켜주고 선생님도 될 수 있다고 해서 일본으로 갔지…”
지곡동 한 아파트에서 홀로 노년을 보내는 전옥남(86) 할머니는 근로정신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광복이 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일본에서 강제 노역을 당한 아픈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1944년 경상남도 마산에 위치한 성호국민학교(현 마산성호초)에 재학 중이었던 15세의 전 할머니는 당시 학교에 온 일본인 3명이 “일본에 가면 꽃꽂이도 할 수 있고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은 일본에 가면 꽃꽂이, 기술 공부도 맘껏 할 수 있고, 공장에서 일하면 월급을 받아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말했지…그게 평생의 한이 될 줄 생각도 못 했어”
일본인들은 진주, 마산, 경기, 이북의 소녀들을 1,2,3차로 나눠 50명씩 연행해갔다.
원래 18~19세 처녀들을 연행했지만 부족한 수를 채우기 위해 각 학교를 돌며 어린학생들도 강제 모집을 실시한 것.
전옥남 할머니는 1차로 출국했고, 이렇게 모여진 근로정신대 50명은 군수물품을 생산하는 ‘후지코시 공장’에서 25명씩 주․야간으로 교대근무를 실시했다.
후지코시 공장의 주 업무는 10kg에 달하는 베어링을 작동시키는 일.
군수물품을 만들려면 베어링을 쉼 없이 돌려야 했기에 전 할머니는 혹독한 노동 착취에 시달렸다.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하루종일 서서 일을 하기에 허리와 다리는 성할 날 없었지만 돈이 없어 병원을 갈 수도 없었다.
영양실조로 인해 눈 앞이 캄캄해지며 현기증이 일어도 쉼 없이 돌아가는 기계를 지키느라 쪼그려 앉아 쉴 여유도 없었다.
“어머니가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손에 쥐어주신 돈까지 후지코시 여자 사감이 강제로 빼앗아 갔어. 끼니라고는 주먹밥 한 개 단무지 한 쪽이 전부였고…일은 일대로 했지만 결국 강제노동에 대한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1945년 7월 고국 땅을 밟았지”
주린 배를 움켜쥐며 후지코시 노동에 참가한 150여명의 근로정신대에게 돌아온 대가는 조국의 외면, 노동력 착취로 인한 신체․정신적 후유증이었다.
하루종일 서서 일한 탓에 척추가 아파서 30분 이상 앉아있는 것도 할머니에겐 큰 일.
베어링을 작동시키다가 어지럼증에 한눈을 판 찰나 오른손이 기계 속에 휘말리면서 할머니의 오른손 검지손가락은 한쪽으로 휘어져 있다.
할머니는 그 때의 악몽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눈물을 펑펑 쏟고 몸서리가 쳐진다고 말했다.
몸이 아플 때마다 근로정신대 강제 연행, 혹독한 노동을 떠올리면 분노와 한이 치솟는다는 전 할머니.
아직도 후지코시에서는 사죄와 미지급 입금에 관한 재판을 할 때마다 “한국 일이니 우리와 관련이 없다”는 답변 뿐이다.
할머니는 “조국의 관심과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원한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눈물로 삼키며 쉬지도 못한채 혹사당했어. 해방 후에도 노동의 후유증으로 성한 곳 없고…돈을 보상하는 것도, 후지코시의 사과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지금 바라는 건 대한민국 사람들이 근로정신대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