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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여성시대]소담소리아트 김금희 대표

“민족의 자산 판소리 계승·발전이 의무”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18-03-02 17:20:24 2018.03.02 17:20:24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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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에 빼곡한 수상 경력을 쌓고, 30대에 국내외 다양한 무대를 판소리로 물들인 소담소리아트 김금희(45) 대표.

김 대표는 10대부터 지금까지 30여 년 간 판소리 외길을 걸어오며 현재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여성 국악인이다.

“열살 때 국악에 입문해서 40대를 넘긴 지금까지 국악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도 많았지만 소리 한길만을 바라보고 지금까지 오게 됐습니다”

김 대표는 창성동에서 자라 10세 되던 해 같이 살던 외할머니의 권유로 ‘군산 국악원’에 입문했다.

“집 가까운 골목에 국악원이 있었어요. 당시 풍류를 즐겼던 외할머니는 외손주인 저에게 한국무용을 가르치고 싶어 했습니다. 마침 당시 국악원에는 성운선 명창을 비롯해 중학생이었던 김학용 선생 등이 활동하고 있어 판소리를 접하게 됐습니다”

김 대표의 첫 스승은 성운선 명창.

판소리는 배우면 배울수록 빠져들었다. 특히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라는 가사로 익숙한 춘향가 중 사랑가를 부를 때면 춘향이 된 듯 설레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실력도 나날이 늘어 갔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고 최란수(전북 무형문화재 2호) 명창에게 사사받은 김 명창은 고 2 시절엔 국내 최초로 수궁가를 완창해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했다.

고교 졸업 후에는 서울예대에 진학해 공부에 정진, 졸업 후 흥보가를 완창했다.

원광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한 이후에는 안숙선 명창을 사사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2002년 29세의 나이에 김 대표는 제10회 서울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에서 최연소 대통령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2007년 8월에는 제자들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에서 2년마다 개최되는 제6회 국제전통음악제(50개국 1500여 명 참가)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1위를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당시 받은 상금 7000달러를 우즈벡 아동병원에 기증하며 우리 국악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서울 동아콩쿨 판소리부문 동상(1992), 제2회 판소리명창 경연대회 최우수상(1995)의 주인공도 바로 김 대표다.

이태리 오페라와 소리의 만남, 모스크바 한민족 대축제 초청공연, 김금희 흥보가 완창 발표회, 창작오페라 ‘논개’ 도창, 김금희 명창과 함께 하는 수궁가, 한국국악관현악단 정기공연 협연 등의 경력도 쌓았다.

판소리 외길은 현재까지도 후학 양성이라는 목표 아래 진행되고 있다.

‘소담 김금희 한국음악예술원’을 열어 제자들을 지도하는 한편 원광대 대학원 초빙교수, 군산대 음대 출강 등으로도 활동하며 전공자를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김 대표의 커리어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연습의 과정은 터널처럼 끝이 없었다.

매년 여름, 겨울 산공부를 연마하며 끝없는 수련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원하는 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땐 때때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김 대표는 “꿈을 포기할 순 없었다”고 회상했다.

“지난 2003년 판소리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전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어요. 우리 것을 지키고 사랑하는 것, 국악에 대한 정체성을 일깨우고 민족의 자산으로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제 책무라고 생각하며 그 맥을 이을 후학을 꾸준히 양성하고 싶습니다”

국악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공연하고 싶다는 김 대표는 “판소리를 계승, 발전하는 것은 평생의 의무”라며 “시민들이 국악을 사랑하고, 제자들이 국악 저변을 확대하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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