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고 이인식 선생 제자들이 6일 현충일을 맞아 월명공원에 세워져 있는 스승의 동상 앞에서 추모 행사를 가졌다>
6일 제53회 현충일을 맞아 .월명공원에 세워진 독립투사 춘고 이인식 선생의 동상 앞에서도 뜻깊은 애국충정의 추모행사가 열렸다.
일제 강점기 임피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독립운동 이후 후학육성에 헌신해 훌륭한 제자를 숱하게 육성한 춘고 이인식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제자들의 자발적인 추모 모임이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이인식 선생의 아들인 이병기 전 중등학교 교장과 친지들 그리고 이인식 선생의 나이 든 제자 등 20여명이 참여했다.
월명공원의 이인식 선생 동상은 2005년 10월 1일 제막됐다. 춘고 이인식 선생의 기념사업회가 결성된 지 12년만의 결실이었고, 7000여 동문들이 3000여만원의 기금을 마련해 보은의 동상을 세웠다.
이후 3월의 3.1절과 6월의 현충일이면 가족과 제자 등의 추모모임이 자연스럽게 매년 이어지고 있다.
◇춘고(春皐) 이인식(李仁植) 선생
춘고(春皐) 이인식(李仁植)선생은 1901년 10월 22일 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에서 당시 거부 이태하 씨의 3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나 임피초등학교 1회 졸업 후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1916년 16세 때 조득 여사와 결혼한 후 항일독립운동이 열린 1919년 3월 1일 보성고보 대표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했고, 시위 군중을 미국공관 쪽으로 유도하는 선봉에서 활약했다. 3월 5일 밤 송현동 자택에서 학생대표들이 모여 협의 중 들이닥친 일본경찰에게 체포(총 43명)됐으며, 10개월의 징역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출감한 그는 25만 여평의 가산을 정리헤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으로 거금 8000원을 헌납했다. 또 독립쟁취를 위해 먼저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일본에서도 그의 활동은 계속돼 재일본 학생 항일결사의 일원으로 항일운동을 도모했다.
이같은 활동은 그러나 1925년 일경에게 발각돼 조직이 일망타진의 위기에 다다르자 일부 동지들과 중국으로 밀항 망명생활을 했다. 주로 동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며 임정요인과 연락, 정보수집과 국내에 잠입해 자금조달 등의 역할을 맡았다.
또 만주 망명지에서 목단강 고려중학교 교장으로 독립투사 자녀들을 가르치던 그는 조국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숱한 정치계의 손짓도 있었지만 문맹률 90%의 당시 암울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교육계에 투신했다. 새 조국의 문맹퇴치 운동에 첨병으로 나선 것이다.
당시 임피, 서수, 나포, 성산 등 4개면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이에 뜻을 가진 조영완 심복동 양일동(당시 국회의원) 등, 임피 서수 지역 주민들이 전답 등으로 출자해 1949년 11월 11일 일인이 경영하던 이엽사 농장자리에 중학원이란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시골 사립학교의 경영이 한계에 달했고 주민들의 탄원에 따라 1952년 1월 18일 임피중학교라는 교명으로 정식 공립중학교 인가를 받았다.
6.25전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학생이 없는 임피중학교가 폐교 위기에 놓였던 1953년 11월 15일 그는 임피중 교장으로 부임해 우선 학생 모집에 나섰고, 훌륭한 제자 배출에 헌신했다.
그의 제자들은 이제 60대를 넘겼고, 이들이 국가의 동량으로 성장한데는 스승으로서 단 한명의 제자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약초까지 캐 판 돈과 사비 등으로 제자의 학비를 보탠 끝없는 제자사랑의 결실이어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에 춘고 기념사업회가 1992년 3.1절 행사를 기해 결성됐고, 스승의 높은 뜻을 이어받아 1995년 2월 임피중학교 동문회는 장학재단 설립해 재학생들에게 매년 500만원 이상의 장학금을 전하고 있다.
정부는 춘고 이인식 선생에게 1962년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 수여했으며, 이듬해인 1963년 3월 25일 별세해 전라북도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선생의 유해는 1974년 10월 17일 동작동 애국지사 묘역 151호에 안장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