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마케팅으로 고군산군도를 잡아라.\"
군산시가 최근 충무공과 고군산군도 등 군산과 관련된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 충무공 마케팅에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시는 임진왜란 당시 수군조선소와 군진이 있었던 이곳을 방문했을 뿐 아니라 수군통제사로서 \'군산이 낳은 명장\' 최호장군과 인간적으로 교류를 통해 사실상 전쟁종식과 왜란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시는 이곳에 망루나 과거 군산진 등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군산과 관련된 스토리 텔링을 만들 방침이다.
◇ 충무공과 충원공, 그리고 선유도 = 충무공 이순신장군(1545~1598년)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 9월21일부터 10월 3일까지 명량해전 승전직후 11일 동안 머물렀다.
충무공은 이곳에 체류하면서 명량해전의 승첩을 조정에 보고하기 위한 장계를 초안하여 조정으로 보냈고 왜란 중에 아산본댁이 왜적들에게 분탕질을 당해 둘째 아들 면의 죽음은 물론 집전체가 잿더미 되어 버리고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는 비보를 전해 듣는 등 충무공의 통한이 서려 있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또 충무공의 무과급제와 인생 선배였지만 자신의 휘하에 있던 충원공 최호장군과 만나 여러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원균이 지휘했던 칠전량 해전의 참패로 전사하자, 통한의 눈물을 흘릴 만큼 두 명장은 서로를 흠모했단다.
그는 이곳에서 기적에 가까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뒤 병들고 지친 몸을 요양하면서 임란을 종식시키기 위한 구상은 물론 전함 건조와 수선 등에 몰두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충원공 최호장군(1535~1597)은 선조 9년 1576년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선조 27년159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선조 29년1596년에는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이몽학의 난을 평정했다.
선조 30년(1597)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 등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임진왜란 최고 명장 중 한 사람이다.
◇ 고군산군도의 전략적인 의미 = 선유도는 본래 \'군산도(群山島)\'라고 불리어 왔으며, 고려시대에는 여·송(麗·宋)무역로의 기항지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해안 연안항로의 거점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군산도(현 선유도)에 수군진영이 창설되었고 세종초기에는 이곳의 군산진이 옥구현 북쪽 진포로 이동하면서 군산이란 명칭까지 옮겨 가므로써 이곳을 \'고군산도\'라고 호칭하게 됐다.
하지만 선유도는 조선시대 수군제도의 변천에 따라 존폐를 반복했지만 군사적 요충지이자 거점지역으로서 역할을 다해왔다.
이같은 선유도가 국제해양관광지로서 새롭게 떠오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새만금방조제가 신시도에서 선유도 등으로 연결될 때 선유도의 위상은 관광명소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건선 군산시의회 부의장은 \"선유도는 고군산군도의 주도로서 역사적인 의미가 클 뿐 아니라 한때 왕릉이 존재할 정도였다\"면서 \"충무공 마케팅으로 또다시 역사의 전면에 떠오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