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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빵 자존심 지킨다”

“2대, 3대가 가업을 잇는 일본처럼 이성당 빵을 명품화하고 싶어요. 어머님이 생명처럼 여기셨던 이성당에서 평생을 바치셨고, 내 일상이 여기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것처럼 내 자식들도 빵맛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서 한국빵의 자존심을 바로 세웠으면 합니다.”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11-08-05 09:13:38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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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1년 전인 지난해 7월 15일 전해진 고 오남례 이성당 초대 사장의 사망소식은 군산시민들에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신 것 마냥 시민들은 진심으로 애도했고, 빵의 대모가 사라진 이성당이 그 맛을 유지하고 여전히 추억을 선사해 주길 기대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기대는 무너지지 않았고 되레 전국 남녀노소의 입맛을 사로잡아 승승장구하고 있다.

또 김현주(48) 사장은 지난 13일 군산교육발전진흥재단에 장학금 1000만원을 기탁, 시어머니 뒤를 이어 선행에도 앞장섰다. 김 사장을 만나 이성당의 역사와 비전을 들었다. <편집자 주>
 

  

“2대, 3대가 가업을 잇는 일본처럼 이성당 빵을 명품화하고 싶어요. 어머님이 생명처럼 여기셨던 이성당에서 평생을 바치셨고, 내 일상이 여기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것처럼 내 자식들도 빵맛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서 한국빵의 자존심을 바로 세웠으면 합니다.”

 

김현주(48·사진) 이성당 사장의 바람이다. 김 씨는 오남례(2010년 작고) 초대 사장의 맏며느리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고 오 사장의 딸로 오해를 받곤 한다. 동글동글한 얼굴, 서글서글한 미소, 빵에 관해서 만큼은 깐깐한 성격까지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같은 생각을 하면 닮는다고 했던가. 오로지 빵 생각에만 몰두했던 고부가 이제 모녀처럼 같은 분위기를 내니 시어머니의 빈자리가 허전하게만은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당뇨로 입원해 한참 고생하시던 시어머니께서 유난히 집에 오길 원하셨다. 아마도 뭔가 직감하신 게 있는 것 같다. 잠깐 퇴원한 사이 당 수치가 떨어지지 않더니 급기야 심장마비로 홀연히 가셨다”고 회상하는 김 씨.

 

김 씨는 “돌아가신 시어머님을 뵈면서 난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한 평생 빵 밖에 몰라 외출 한 번 못하신 시어머님이 안쓰러워서였다. 그런데 지금 난 그 때 시어머님처럼 친구 하나 만나지 않고 그렇게 살고 있다”며 수줍게 웃었다.

 

“어머님께서 2003년도에 내게 모든 경영권을 넘기신 후에도 매일 가게에 나와 손님 맞는 걸 즐겨하셨다. 손님들도 어머님이 안보이면 일부러 찾아 인사하곤 했다”며 일화를 들려줬다.

 

그 예로 1993년에  한 일본인 노부부가 찾아와 “해방 전 이성당이 있던 월명동 근처에서 소학교를 다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당시의 이성당을 기억하고 있었다.

 

패전 뒤 부모를 따라 고국으로 돌아간 소년은 커서 제법 이름난 음악가가 됐다. 부인과 함께 수십 년 만에 다시 찾은 군산에서 그는 시어머니 오 씨에게 40년대의 월명공원과 중앙로 거리를 설명하며 즐거워했다.

 

그 뒤 그 일본인은 해마다 이성당을 찾았다고. 그러던 발길이 멈춘 것은 2003년쯤. 그 모습을 보면서 김 씨는 “이 다음에 나를 찾는 이들이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런 김 씨는 이성당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같은 절에 다니던 시어머니 오 씨가 김 씨를 며느리 감으로 점찍었고, 이후 김 씨 친정어머니로부터 사주를 받아 궁합을 본 뒤 결혼식을 치렀다고 한다.

 

김 씨는 “남편이 22살 되던 해에 시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당시에 시어머님께서는 병원에 입원해있었던 상태였고, 6남매의 장남이었던 남편이 졸지에 가장이 되면서 이성당을 이끌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 때가 1979년. 당시 남편의 아이디어로 지금의 야채빵과 모닝세트가 탄생했고, 그 덕분에 이성당은 새로운 성장의 계기가 됐다. 김 씨의 남편 조성용 씨는 자회사인 팥앙금 제조회사 ‘대두식품’을 설립해 성공을 거둬 현재 전국 빵집 대부분이 대두식품의 팥앙금을 사용하고 있다. 

 

김 씨는 “이성당이라는 이름 때문에 금은방으로 오해하는 외지인들도 있었다.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케이크가 드물던 시대였다. 전국 최초로 케이크를 생산했던 곳도 우리 이성당이다. 좋은 날, 중요한 날엔 언제나 이성당 빵이 함께 했다”면서 이성당과 시민의 삶이 얼마나 밀접한지 설명했다.

 

“60년대에는 맞선 장소로, 70~80년대는 중고생들의 미팅장소로, 90년대는 젊은이들의 데이트장소로, 2000년대는 중장년층의 사랑방으로, 2010년대는 전 국민의 나들이 장소로 거듭나면서 군산 시민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이성당에 관련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성당이 이토록 오랜 기간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변치 않은 건강한 맛 때문이었으리라. 김 씨는 “시어머님은 늘 부지런하셨고, 약속을 매우 잘 지키셨다. 무엇보다 정직함은 따라 올 사람이 없었다”면서 “지금도 재료만큼은 좋은 걸 쓰자고 하시던 어머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고 했다.

 

또 시어머니 오 씨는 누구보다 인재육성에 힘을 쏟았다. 제빵사 출신이 아닌 오 씨가 빵집을 경영한다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그래서 오 씨는 동시대의 다른 운영자들과는 달리 제빵사들을 끊임없이 교육시켰다. 김 씨는 그런 시어머니의 철학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해마다 실시하는 일본연수를 비롯해 최근엔 미국연수도 시도하고 있다. 또 50여명의 직원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작업환경과 근무여건을 개선하는데도 노력을 기울여 동종업계에서는 가장 높은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김 씨에게 경영철학을 물었다. 돌아온 그의 답변은 “빵집은 빵이 맛있어야 한다”였다. 그는 더불어 “케이크, 아이스크림, 초콜릿도 중요하지만 빵집은 빵이 맛있어야 한다”며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김 씨는 또 “군산시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대를 물려 우리 이성당을 사랑해주신 덕분에 지금 전국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동안 입소문을 내 주신 시민들과 외지인들에게 적극 홍보해 주신 택시기사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덧붙였다.

 

매뉴얼화된 프랜차이즈 빵집들이 범람하는 요즘 세대에 감히 넘볼 수 없는 시간과 정성, 정직한 재료로 깊은 빵맛을 이어가고 있는 이성당이 앞으로도 지나온 시간 이상 넉넉히 생존할 것이라는 믿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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