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운수업계에 수년간 종사하다가 귀국후 작은 회사의 사장이 된 사람이 있다. 70명 정도의 사원을 모아 놓고 나는 24시간 문을 열어 여러분과 대화를 통해서 회사를 경영하겠다는 내용의 취임 인사를 했다. 사장으로 집무한지 약 2주일이 경과했을 때 그 사장은 간부사원을 불러서 사원과의 대화창구를 닫아야 하겠다고 상기된 표정으로 사연을 털어놓았다. 밤 12시에 숙소로 전화해서 깊은 잠을 깨워놓고 기억하기도 힘든 사원이 직책을 밝히면서 지금 혼자 야근을 하고 있다며 회사의 처우문제부터 동료의 비위사실까지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인 다음 본인의 애로사항이라는 꼬리를 달아 사장님에게 심야전화로 말씀드린다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사장으로 취임한 2주동안에 10여차례나 그런 전화와 숙소방문 사원들을 접하다 보니까 이제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렵다는 황당한 일에 불쾌하다는 얘기이었다. 가장 민주적 방법으로 회사를 이끌어가기 위해 24시간 대화창구를 열었다고 말한 것이 정말 후회된다는 것이다. 대화창구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창구를 악용하거나 소모성얘기를 불필요하게 만들어내면서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 사원에게 문제가 있다. 새만금사업을 그런 맥락에서 상기해 본다면 그 당시 도백이 환경보호론자에게 허심탄회한 대화를 하자고 했다. 그 도백도 미국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다. 100% 합의를 이끌어 내는 민주방식이 제대로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허파 같은 갯벌이니 또는 시화호의 재연이니, 경제성이 어떠니, 예측성 추측성 자연사랑의 갯지렁이의 소중성 갖가지 발언도 모자라서 특이한 시위행사까지 만들어 냈다. 피해결과도 없는 견해차이를 놓고 법정까지 끌려간 새만금사업을 역사에 무어라고 기록을 남길 것인가. 환경논리 예상 얼마든지 빗나갈 수 있다 지나친 환경보호론은 이상주의의 도그마 현상을 낳는다. 그들의 과학적 예측이라고 주장했던 과거의 사례가 얼마나 허상 이었는가를 기억한다. 지난 세기에 재앙을 예측했던 문제들 가운데 지구촌은 식량부족이 온다, 화석연료와 광물질 재생이 되지 않아 경제성장의 한계에 이르렀다, 빙하시대가 올 수도 있다. 그런 예측의 허구성이 입증됐던 것을 인식하고 있다. 지구의 온도는 높아졌고 교토 의정서(기후변화 협약에 의한 온실가스 감축목표)가 요즈음 세계적인 뉴스로 등장했다. 또한 재생이 불가능하다는 자원의 상업적 보존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 황무지로 버려졌거나 지구의 온난화로 인해 뜨거운 여름철에 오염된 갯벌 속에서 폐사되는 조개들을 지켜봤다면 새로운 땅을 만들어 우수한 품질의 간척지 쌀을 생산하고 재화창출을 위한 관광권역과 동북아 교역기지, 기업형 도시등 다목적으로 활용 할 수 있는 갯벌이 아닌 현대적 공간은 정말 후손들에게 훌륭한 유산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서해안의 갯벌은 무진장하다. 군산항을 외항으로 변화시켰고 곰소항을 폐항의 위기로 몰고 간 주역이 바로 갯벌이다. 개발정책과 환경보전의 조화 국제경제질서의 흐름은 성장과 환경보전의 적절한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새만금은 이미 개발목표의 도착점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서 새만금사업이 환경훼손의 가해자가 될 수 없다. 처음부터 친환경적 사업으로 진행됐으며 환경보전 차원의 과학적인 설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용도가 애매한 개발이란 있을 수 없다. 농지와 관광 업무공간등 국토개발은 다목적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황무지와 같은 갯벌 보다는 경제적 성장의 대열에 편승해야 한다는 것은 인류의 희망이 아니었던가. 전북의 공업화는 그동안 열망해 왔던 것처럼 이루지 못했다. 전국토에 비교한다면 공업중진급 대열에 서있게 됐는지 모르겠으나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제 소모성 대화의 창구는 막을 내리고 새만금사업을 상식이 순리라는 평범한 인식에서 매듭을 푸는 게 합당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