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신문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콘텐츠

정치

우리는 금강에 살어리랏다 - (41)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01-02-11 00:00:00 링크 인쇄 공유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나포면 주곡리와 일본인 지금이 당시 몽땅 빼앗기고 배골았던 시기 추수하고 나면 홀대만 남아 목욕탕까지 갖추고 살았던 일인 일제시대 당시 나포면 주곡리와 서포리에는 각각 2가구씩 모두 4가구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고 외곡리 김한수 이장(67)은 증언한다. 김 이장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한마을이었던 주곡리 둔기마을에 쓰루마치가 살았고 대동마을에 승원이라 불린 일본인이 있었다. 또 서포리 원서포에 서극과 신기마을의 이무라 등이 빼앗은 옥토에서 세금을 받아가며 잘먹고 지냈다는 것이다. 대동마을의 승원이란 일본인이 살던 곳에는 탱자나무 담장의 양옥집이 새로 들어서 당시의 형태를 찾아볼 길이 없지만 집 앞의 논과 밭은 그대로여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당시 얼마나 강제로 빈부의 차를 겪어야 했는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곳 들녁을 통 털어 당시에는 「황골구석」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 황골구석에서 농사를 지어 추수를 하고 나면 홀대로 탈곡해 일본인 지주에게 세금으로 바치고 나면 빈 홀대만 지고 오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렇게 착취당하고 나면 다시 농사지을 비용과 생활비 등을 일본인에게 빌어 쓰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이자와 원금에 조선인들은 자연 생활이 갈수록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을 게다. “이들이 우리말도 곧 잘해 의사소통에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배급을 주었다. 또 다른 곳을 점령했다는 일본군 승전보가 오면 광목과 신발 등 기념품도 제비뽑기로 1∼2명에게 나누어주었을 뿐 그들의 고리놀음과 세금 등에 다 뜯기고 주곡리 주민들은 당시 이맘때쯤이면 지독한 배고픔을 이겨내야만 했다. 당시는 신발도 없어 짚신을 삼아 신거나 나무로 깎아만든 신을 신어 발이 터져 고생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를 듣던 중 김 이장은 외곡정 앞의 집을 가리키며“여기가 쓰루마치의 형이 살았는데 나이가 들어서도 결혼을 못했고 쓸쓸하게 살았다”고 설명한다. 타향살이에 그들도 마냥 행복할수 없었을 것이라고. 외곡정을 지나 길가 둔기마을의 입구에 이르러 승원이란 일인이 살던 기와집 앞에서 발길을 멈춰 섰다. 지금도 그 당시의 기와집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일인들이 얼마나 권세를 누렸을까 짐작케 한다. 일인들은 빼앗은 토지 덕에 호위호식하며 목욕탕까지 갖추고 살았다. 집안에 별도의 샘도 있었고 집 입구에 감나무가 있었다고 김 이장은 기억한다. 그러면서 김 이장은 쓰루마치가 두 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식이자라고 부른 큰아들은 폐병으로 죽었고, 고자라고 부른 둘째는 정상적이지 못해 칠푼이로 여겨 당시 50이 가까웠어도 결혼을 못하는 등 이국 땅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조선인의 땅을 강점해 배를 곯게 했던 그 만행에 대한 벌이었을까? 그렇게 결코 행복하지 않은 시간을 살았던 일인들은 패전 소식에 쓸쓸히 나포면을 떠났고, 당시의 외곡마을 입구 19그루였던 소나무가 길을 넓히느라 너 댓 그루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전해주고 있다. 일본인들의 만행이 가득했던 나포면 일대의 금강은 그 당시와 달리 강폭이 크게 좁아지고 자주 오가던 어선도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고향을 지켜온 이들이 그 고통의 세월을 지나 오늘의 발전상을 즐거이 맛보는 나포 사람들의 어제·오늘을 여전히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김석주 기자>

※ 군산신문사의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카피라이터

LOGIN
ID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