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포면 원서포마을 입구에 슈퍼가 자리해 있고 그곳에서 오락가락 하는 장미 비를 피해 마을 주민들이 모여 앉아 휴식 중이었다. 그곳에서 80년 가까이를 원서포만 지켜보며 살았다는 김봉남씨(79)를 만나 마을의 이모저모를 들어보았다. 우리 나라가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되던 해에 22살이었던 김봉남씨는 일본인들의 우리 농토 착취와 지질이 배고프게 살이야 했던 시절들을 생생히 기억하며 팔순이 다된 나이에도 비교적 정정한 모습이었다. 평생을 농사 일로 다져진 건강이기에 이제는 힘이 부치지만 여전히 운동 삼아 농사 일 한다는 김씨의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김씨의 조부는 한약방을 운영했던 터라 그다지 어렵지 않게 살았으며, 독자였던 김씨의 아버지가 가업을 잇지 않고 훗날 목수 일을 했지만 당시 집 짓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은 탓에 벌이가 적었기에 김씨는 농사를 택해 전념해 왔다. “지금이니까 배고픈 줄 모르고 넉넉히 살아가며 불만도 이야기 할 수 있지 일본 놈이 농사 지으면 모조리 빚 갚는 셈으로 다 가져가고 볏집만 얻어 쓰던 때는 먹을 것이 없어 배도 지독히 골았고 물로 배를 채우거나 얻어먹으러 다니기 일쑤였지만 얻어먹을 곳조차 그리 흔하지 않은 탓에 숱한 고생을 했지. 공부를 못했던 것도 다 어려웠기 때문이야.” 이처럼 일본 농장주인(석국이라 불렀다 함)이 수확철만 되면 모조리 벼를 가져가곤 했던 시절에 금강은 그야말로 생명 줄이었다 한다. 배고프면 강가에 나가 고기나 게 등을 잡아먹을 수 있었으니 자연 금강은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이런 금강에서 김씨는 원서포 물문 앞까지 배가 들어와 잡아온 생선을 퍼 내리느라 시끌벅적한 가운데 수많은 고기들이 거래되는 모습을 목격하며 자랐다. 객주들이 바삐 움직였고 물문 앞 등 서포 일대에 들어선 12채의 주막들에선 탁주에 젖어 흥겨운 노래가락들이 흘러나오는 등 시장이 들어선 것이었다. 김씨의 기억으로 1930년대 서포를 통해 거래된 수산물들은 3월과 4월에는 조기와 갈치가 많았고 홍어와 상어도 보았으며, 6월과 7월에는 황새기 등이 젖갈류로 많이 쓰였다 한다. 지금의 금강은 금강하구둑으로 막혀 서포를 오가던 배들도 사라졌고 객주건, 주점이건 흔적조차 없으니 유수와 같은 세월을 탓할 수밖에 없다는 김씨의 독백이 듣는 이의 귓속을 파고든다. 그래도 요즘은 수년간 풍년을 느끼게 해준 벼가 논 가득히 잘 자라고 있음이 즐거울 뿐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왜 그리도 농사가 안되고 소출도 적었던지…. 금강은 이제 더 이상 포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지만 거대한 호수로 변해 물 걱정 없는 농사를 허락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말없이 인간을 돕는 금강이야말로 김씨를 비롯한 원서포 마을 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고마운 존재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금강 가까이에서 살다보니 철새들에 의한 농작물 피해, 금강을 가로질러 난 서해안고속도로 금강대교 건설로 마을 뒤 영산인 비룡봉의 훼손 등은 마을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김석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