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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금강에 살어리랏다 -(56)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01-09-08 00:00:00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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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과 나란히 자리해 있는 오성산이 우리의 영산임을 말해주는 오성산에 얽힌 많은 유래와 유서들은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기에 충분하다. 금강변 오성산 기슭은 강가와 가까운 쪽의 성산면 도암리와 돌아들어 자리한 고봉리 등으로 나뉜다. 이 중 도암리에 속한 마을의 하나인 환동(環洞시)마을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이곳 환동마을은 마을의 형태가 고리같다 하여 「고리터」라고 부려온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흥망과 관련됨 마을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 다. 이 고리터에는 대대로 김씨(金氏)가 살고 있는데, 고려 왕족인 왕씨(王氏) 일가족이 개성에서 탈주해 이곳에 숨어살았고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성(姓)을 김씨로 고쳐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고려사람이 산다해서 고려터라고 부르다 점차 소리가 변해 고리터로 부른다는 이야기인데, 보다 정확한 고증이나 사료연구가 필요하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이곳에서 혹 고리를 만들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고리를 만들 여건도 안되거니와 아직까지 고리를 만들어 생활한 흔적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흥미를 더했다. 성산면 고봉리 「채원병의 집터」이야기는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고봉리(高峯里)의 오공혈(蜈蚣穴) 또는 지네터라 불리는 이곳의 고봉산은 그 한맥이 지네와 같은모양으로 이 혈맥이 채원병씨의 집터로 흘러 이 집 한가운데가 지네의 어금니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한다. 한 고승이 이 집터를 잡아주며『이곳은 지네모양으로 되었고 지네는 불빛이 있으면 움직이지 않으므로 오봉산(봉화대가 있는 봉오리)을 마주보게 하여 집을 지으면 집안이 크게 일어나고 오래 번영을 누리게 된다. 또 지네는 숲에서 사는 생물이기에 항상 그늘을 만들어주어야 하니 집 앞에 나무를 많이 심어 그늘지게 하고, 대문 앞에는 연못을 만들어 지네가 목마르지 않게 하라. 오봉산에 봉화의 불이 있으니 이 집은 계속 흥할 것이고 만일 봉화대가 사라지면 가세가 기울 것이니 다른 곳으로 옮겨가라』고 말했다 한다. 도승의 말대로 한 채원병씨 집안은 계속 번창하였고 그 부가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라 하였다. 그런데 봉화대가 없어지자 도승의 말대로 가세가 기울었단다. 비록 구전이긴 하나 오성산의 영적인 면을 대변해 주는 좋은 예로 여겨진다. 오성의 묘 전설은 실화 여부를 놓고 한창 논쟁이 뜨거우나, 오성산에서 신라와 연합한 중국 당나라 소정방 군대를 맞아 싸우다 전사한 백제 군사와 장수들의 장렬한 최후를 상징화해 그들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성지로 삼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함이 알맞을 듯 싶다. 다섯 노인이 오성산 정상에서 장기를 두던 중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길을 묻자 백제의 사람으로 거절하자 소정방이 이들의 목을 베었고, 훗날 이들의 충절을 애틋하게 여겨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전설은 허구라 여겨진다. 그러나 오성산의 봉화대가 주요 통신수단인 점 등을 감안할 때 주둔해 있던 백제 군사들이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고 그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많은 무덤이 오성산내에 산재해 있었음을 감안할 때 오성산에 우리 선조들의 충절이 서려있음은 분명하다. 차차 오성산 기슭 마을들을 돌며 다시 오성산에 담긴 숱한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 보아야 갰다. <김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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