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면 일대에서 금강과 접한 곳이 성덕리(聖德里) 일대이다. 이곳에는 성덕마을과 항동마을, 요동마을이 나란히 금강을 접하고 있었다. 성산면의 최 서북단 위치한 성덕리의 지명이 최초로 쓰여진 때는 1914년으로 일제가 대대적인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붙였다 한다. 당시에는 선독골과 달게, 요동이라 불렀던 마을들이 있었다. 지금의 성덕마을 앞 저수지 뒤에 큰 돌 하나가 서있었기에 이곳을 선독골이라 불렀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며 聖山面(성산면)의 聖자에 德(덕)자를 붙여 성덕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현재 성산면 삼거리 약국 안집에 사는 황원택 전 성산면장은 선독골의 선독이→선덕→성덕으로 변한 것이라 말했다. 황 전면장은 이어 성덕마을의 형성시기가 옛 삼국시대였다고 볼 수 있으며, 확실한 연대는 모르나 조선조 중기부터 차차 마을형성 연대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성덕마을에는 제주 고씨 世益(세익)이라는 사람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대대로 생활해 지금도 많은 후손들이 이곳 성산에 살고 있다 한다. 제주 고씨의 가문을 빛낸 후손들로는 嘉善大夫(가선대부) 明吉(명길)과 그 아들 通政大夫(통정대부) 云鎭(운진), 正憲大夫(정헌대부) 右昌(우창) 등 많은 선비와 벼슬을 산 이들을 배출했다. 이후 성덕에는 金(김)씨와 林씨(임) 등이 터를 잡고 살았다. 47가구 1백41명의 주민이 사는 성덕마을은 청년회 중심으로 1년에 한차례씩 따뜻한 봄날을 택해 노인들을 위한 경노잔치를 열어오고 있으며 마을주민들의 우애를 돈독케 하고 있다. 황 전 면장은 성덕리의 동쪽에 영산인 오성산이 자리해 있고 서쪽으로는 翰鳳山(한봉산)이, 자리해 소위 명당으로 알려진 태학(胎鶴)재와 한봉산내 봉두(鳳頭)혈이 있다며 흥미를 끌었다. 그 덕에 이곳에는 많은 지사(地士)들이 찾아들었고, 그들은 이곳을 삼성칠현(三聖七賢)의 명당이라 했다니 옛부터 숱한 사람들의 발길이 찾아들었으리라 짐작된다. 황 전면장은 성덕마을에 성살이방죽(聖德堤)과 대숩골방죽, 선독방죽 등 세곳의 제방이 있는데 붕어와 가물치, 메기, 피라미 등이 많아서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성덕마을의 중심지에는 400여년된 팽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자리해 이 마을 주민들을 오랜세월 지켜보며, 주민들 또한 이 팽나무를 소중하게 보살핀다. 마을의 동남단에는 1937년 8월에 건립된 평산 조씨제실 추모제(平山 趙氏祭室 追慕齊)가 있는데 후손들이 조상의 음덕에 정성을 다해 예를 올리는 곳이다. 6.25동난 전까지만 해도 당산제가 있었던 성덕마을은 최근까지 마을제로 바꾸어 청년회를 중심으로 마을주민 전채가 참여한 가운데 경노효친 정신을 실현하고 마을 단합의 날로 이어왔다. 옛부터 효자효부와 열녀가 많았던 성덕마을에는 1929년 국내에서 가장 작았던(몽리면적 25㏊) 성덕수리조합이 있었다. <김석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