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 금강 주변을 좀 벗어나 금강 물이 도수로를 따라 흐르게 되는 산너머 수심마을에 이르렀으니 오성산을 끼고 난 도로(706호 지방도)를 따라 형성된 마을들을 더 들려보기로 했다. 금강에서 산 속 도수터널을 타고 흘러 수심동에 이르는 금강물은 다시 제2도수터널을 따라 동요마을에도 와 닿는다. 오성산을 등에 업고 앞에는 넓은 여방들녘이 바라다 보이며 군산-나포간 도로변에 위치한 동요(東堯)마을의 이름 속에는 살기 좋은 터전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하니 그 유래가 궁금해진다. 황원택 전 면장이 들려주는 바에 따르면 동요(東堯)라고 부른 연유는 오성산봉에서 산세를 내려다보자 동쪽로는 동요, 서쪽으로는 성덕리 요동으로 산의 기운이 뻗쳤으니 살기 좋은 터라 하여 중국 요임금의 이름을 따 동(東)쪽의 요(堯)로 부르며 자손 대대로 평안한 삶을 누리고 있다 한다. 이 마을의 형성시기는 조선 중기(1550년경)에 원주 원호(原州 元昊)의 자(子) 국견씨(國堅氏)와 문화유씨(文化柳氏)가 경기(京畿) 이천(利川)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이곳이 불모지였으나 이들이 정착하면서 새로운 삶의 터로 정리하여 아담하고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동요마을에는 한 때 모두가 원씨(元氏)들만이 살아 원촌(元村)이라고도 부른 까닭이 되었는데 지금은 원씨성을 가진 이들이 크게 줄어 현재 27가구 중 7가구만이 남아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마을을 가르며 8가구가 시내로 이주하는 등 세월의 변화에 따라 사는 이들의 이동이 많았다. 동요마을은 농사와 직장에 다니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이 마을의 농사는 1940년에 축조된 마을 앞 동요제라 부르는 작은 저수지 물을 이용하고 있으나 고속도로 공사로 저수지 일부를 잠식당했고 가뭄이 심하면 농사가 걱정이라고 이 마을 김선애 이장(34)은 말했다. 김 이장은 올 쌀값이 떨어진데 따른 주민들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데다 올 가을의 지속된 가뭄으로 내년 봄 물 걱정까지 겹치면 어쩌나 하는 우려의 마음을 나타냈다. 그런데 앞으로는 동요마을에서 산너머에 있는 금강물을 받아오기 위해 현재 이웃 수심마을에서 동요마을간 3백92m의 도수터널 공사를 착공하려 하고 있어 근본적 대책이 시행중임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다고. 금강호의 물이 얼마 안 있으면 여방들녘으로 퍼져 농사 일이라도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해 준다 하니 기대된다는 것이다. 동요마을은 대대로 큰 재앙 없이 씨족간에 우애하며 마을을 지켜왔고 성실 근면한 생활로 부를 누리는 이들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전통의 마을이 고속도로란 문명의 시설과 만나 만들어지는 새 삶의 여건에 적응해가고, 하늘만을 쳐다보아야 했던 천수답들이 농업기반의 대대적 공사로 인해 산너머 금강 물을 직접 이용할 수 있는 시절이 다가오는 등 동요마을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김석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