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채만식 선생의 곁에는 항상 가난과 질병이 함께 했다. 49세의 그리 길지 않은 평생을 문학에 바친 고독한 작가였던 것이다. 18세의 나이에 치른 억지 혼인이 사실상 실패로 끝났고, 현실도피적인 일본유학의 결단마저도 관동대지진과 집안의 재정파탄이 겹쳐 접어야만 했던 채만식 선생은 그나마 완강하고 자유분방한 기질 덕에 현실을 싸안으며 생활을 이어갔다. 스포츠와 들꽃을 좋아했던 채만식 선생은 중학생 시절 축구선수였고, 일본 유학시절 와세다대 대표 센터포드로 활약했다. 그러나 대학을 떠나며 그 어떤 운동도 하지 않았다. 자연을 사랑하는 채만식 선생의 마음은 운명을 앞둔 유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장례에 상여를 꾸미지 말고 리어카에 들꽃으로 덮으라고 말했다. 채만식 선생에게서 가장 특징적인 성품은 지독한 결벽증을 꼽을 수 있다. 깨끗하게 잘 정돈된 방에서 깨끗하게 세탁된 옷만을 입고 다녔으며, 책도 남에게 빌려오거나 빌려주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돈 관계도 정결해 꾸어주는 일도 꾸는 일도 없었다 한다. 남이 잡은 문고리를 절대 잡지 않으리만치 심했던 그의 결벽증은 매사를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고 요령을 피우는 일을 결코 용납지 않았다. 이러한 성품이 그의 작품 속에서는 세심하게 나타나 문장부호 하나 허술하게 다루지 않았으며 철저한 냉정성을 유지한 문장을 기술해 냈던 것이다. 그의 무서우리만치 지독한 냉정성은 두 부인사이에서 적당히 오고가지를 못하는 성품상 본처 아들이 20세에 이르기까지도 만남이 없었고 큰아들 무열의 죽음을 접하고서야 딱 한 번 처자를 만나게 했다. 채만식 선생의 만년은 일제하의 식민지적 학대 밑에서나 해방후 혼돈의 와중을 거치면서 줄곧 이어진 가난이었고, 죽음에 임박해서도 두려워하지 않던 채만식 선생은 남겨진 가난을 깊이 우려하며 불우한 생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