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물막이 공사를 할 때가 방조제 최종물막이 보다 더 어려웠다고 술회한 금강하구둑 공사기록 일지에는 배수갑문 공사가 끝나 가물막이 제방을 제거하면서 가제방의 유실방지를 위해 쌓아놓은 돌과 흙을 치우는 일에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정작 배수갑문공사를 마무리하고도 어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배수갑문 조작을 못하게 되자 갑문 상류부의 유입 도수로에 부분적인 세굴(洗掘)현상이 일어나 공사관계자들을 한 때 긴장시켰다. 이에 비하면 방조제나 통선문, 어도 등의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된 셈이었다. 특히 방조제 공사시 축조재료로 해사를 준설하여 성토해 방조제로 인한 자연훼손 없이 공사를 하였음에 당시의 여타 방조제공사와 색다른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어려운 공사들을 하나 둘 마무리하고 금강하구둑이 모습을 드러낸 1989년 7월21일 금강 물을 이용한 농업혁명의 기반인 금강(Ⅱ)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 시행계획이 농림수산부의 고시(제89-44호)로 인가됐다. 금강하구둑의 완공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 11월20일 금강하구둑이 준공됐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조경식 농림수산부장관, 정창화 국회농림수산위원장, 김영진 농어촌진흥공사 사장을 비롯 군산과 전북지역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금강하구둑 준공식이 치러졌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정부는 잘사는 농촌건설을 위해 농업구조개선과 영농현대화 등 종합적인 농촌발전 대책을 추진했다”고 말하며“금강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의 1단계 공사인 금강호의 건설로 이 지역은 새로운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됐다”고 강조했다. 이로써 군산에서 차량을 이용해 서천지역을 갈 경우 논산을 거쳐 강경으로 돌아 120여㎞를 달려가야 했으나 단 10㎞로 단축돼 양 지역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계기가 됐다. 개통식 날 행사를 마친 노 대통령은 지역주민 등과 버스에 타고 개통된 금강하구둑 1.7㎞ 구간을 처음으로 달렸다. 금강하구둑의 완공으로 주변의 변화물결이 삽시간 밀려왔다. 오지로만 여겼던 성산면 성덕리 요동마을 등 일대가 전북과 충남을 잇는 가교로 변했으며, 많은 차량들의 유입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더불어 금강 주변의 무성했던 갈대밭도 점차 자취를 감추며 각종 시설들이 들어섰고 변화의 물결을 주도했다. 금강호가 생겨나며 이 지역 일대는 관광지로 변했고 전국에서 금강하구둑을 찾는 관광버스 행렬이 줄을 이었다. 전국 최대규모의 방조제 주변에 생긴 넓은 광장들과 풀밭들은 금강하구둑을 찾는 이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기 안성맞춤이었다. 금강하구둑의 완공은 군산의 동부권 변화를 주도하는 근원지로 최근 연안도로 개통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변화들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