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금강하구둑 공사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산골마을에 불과했던 성산면 성덕리 요동마을은 공사로 두동강이 나면서 일부는 사라졌고 일부는 발전의 뒤안길에 남아 금강호 일대의 변화를 바라만 보고 있다. 요동마을 안석환 이장(46)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오늘까지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는 마을의 젊은 층이다. “금강하구둑이 만들어지던 때 20대의 나이여서 한창 농사일 등으로 생활했는데 내흥동 사옥마을 앞으로 났던 택시한대정도 지나갈 좁은 길이 전부였던 산골의 변화는 정말 빨랐습니다. 솔찬히 컸던 느르지산이 없어졌고 그 산밑에 있던 굴바위에서 마을 사람들이 무슨 일만 있으면 굴을 따다 잔치를 벌였습니다.” 안 이장은 굴뿐만 이니라 이 굴바위에서는 조개와 새우도 잡고 낚시로 망둥어도 잡았던 생활의 장소였다며 금강하구둑 건설에 추억이 사라졌듯이 점차 남은 마을의 모습도 시간 속으로 묻혀 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했다. 마을 앞의 논도 모두 하구둑부지로 들어갔고 당시 농사를 짓지 않던 주민들은 실뱀장어(시라시)를 잡아 생계를 유지했다. 논은 몇다랑 되지 않았고 현 금강하구둑 검문소 뒤편에 있던 성죽골 전체가 없어졌다. 성죽골 사람들은 시내로도 가고 당시 옥구 열대자 등으로 농사지으러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 안 이장의 설명이다. “성산초등학교를 걸어다녔는데 그 때 친구들이 모두 떠나 마을에는 젊은이들이 없고 노인중 남자도 3명에 불과한 대부분이 여자 노인들만 남아 요동마을을 지키고 있다”는 안 이장은 빈집들이 늘어나 7채가 흉가로 변했다고 덧붙였다. 요동마을 사람들이 금강하구둑의 발전에 영향을 못받은 이유에 대해 안 이장은“땅도 돈도 없는 마을 사람들이 잘 살리 없고, 당시 갑자기 10배나 땅값이 올라 평당 3천원 하던 땅을 3만원에 많이들 팔아 지금은 가진 것이 없다”고 설명했다. 30여년전에 새로 지었던 집에서 살고있는 안 이장은 마을 안길로 가끔 외지인들이 들어와 보고는 금새 허술한 마을 모습에 실망해 돌아나가기 일쑤라며 규제지역으로만 묶을 것이 아니라 오래된 마을을 조금씩이라도 보기 좋게 정비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 발전의 뒤안길에서 씁쓸함을 삭이며 살아가는 요동마을 주민들의 바람이라고 강조했다. 옛날의 요동마을 주민들은 서로 정이 깊어 즐겁게 살았는데 발전으로 도로교통은 편해졌지만 하구둑 인근 외에 별다른 발전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마을 안 사람들의 다툼이 많아졌다는 안 이장은 앞으로 보이는 내흥동 일대의 철길과 큰 도로 등이 완공되면 역 주변으로 도시화가 이루어져 그 물결이 요동마을로 밀어닥치리라 기대하고 있다. 금강하구둑 서천쪽의 번쩍이는 불빛들과는 달리 성산면 성덕리 요동마을 주변은 비교적 어둡다. 그리고 그 뒤안길 오성산 아래의 요동마을 안길 가옥들은 발전의 혜택을 받지 못한채 말없이 세월의 풍파와 함께 서서히 낡아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