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900만명의 무의미한 죽음이 있었다. 레마르크는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전쟁의 참혹성과 비인간성을 고발했다. 모든 이상과 신조는 실종됐고, 오로지 가혹하고 비정하고 부조리만 횡행하는 전쟁터의 참상을 생생히 그렸다. 작품 속의 종결 시점도 1918년 가을이었다. 이처럼 처참한 '죽음의 축연(祝宴)'을 겪은 인류는 또 다시 '겨울사신(死神)'에 직면했다. '스페인독감'의 창궐이었다. 1918년 봄 한 미군 병영에서 발생한 이 독감은 병사들의 이동에 따라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번져갔고, 미국과 중국, 러시아로 번져 전 인류의 절반이 앓았다. 미국에서만 55만여명이, 전세계적으로 2천500만명이 숨졌다.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도 언급했을 정도로 독감(인플루엔자)은 오래됐으나 아직 미정복 단계이다. 16세기 중반 영국 인구 20% 정도가 독감으로 사망했고,20세기 들어와서도 스페인독감 외에 1957년 아시아독감으로 100만명이,1968년 홍콩독감으로 70만명이 전세계적으로 희생되었다. 바로 슈퍼독감으로서 전쟁보다 더 무차별적이며, 더욱 가혹하고 비정한 불청객이다. ▼영국의 BBC가 이달초 스페인독감에 버금가는 '킬러 슈퍼독감'이 올 겨울 유럽대륙에 발생할 가능성을 예고한데 이어 세계보건기구(WHO)가 슈퍼독감 가이드라인을 내년 3월 발표할 예정이다. 슈퍼독감 대유행 30년 주기마저 이미 넘긴 상태이다. 게다가 최근 독감예방주사를 맞아도 효과가 없어 감염된 환자가 급증, 슈퍼독감의 출현이 우려되고 있다. 이 독감이 유행하면 전체 국민의 10~30%가 감염되고, 인명 피해는 불문가지이다. 독감은 현재 A,B,C형 세가지 바이러스가 발견돼 있지만 특효약이 없다. 발병 때마다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키기 때문에 백신개발이 따르지 못한다. 체력과 휴식이 최선의 처방전이며, 독감 환자나 사람 많은 곳을 피하고 귀가 후 양치질과 손 씻는 게 예방책이다. 한 시인의 표현처럼 독감은 도둑괭이의 발톱을 하고선 호시탐탐 인간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다. 슈퍼독감, 그 이름부터 가공할 파괴력을 지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