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12월 함남 영흥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찍부터 종교를 통한 세상 구원에 관심을 가졌다. 처음에 개화사상을 외세와 동일시하여 거부했던 선생은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토국민신보(討國民新報)'를 읽고 개화사상의 의미를 깨달아 1908년 고향에 연명학교(鍊明學校)를 설립하여 개화사상을 몸소 실천하였다. 1909년에 천도교에 입교한 선생은 서울에 올라와 천도교의 교화·교리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교단 지도층의 실상을 목도하면서 천도교 개혁운동에 앞장서 교단에서 출교당했다. 1912년에 선생은 구이봉(九而峰) 산실(山室)에 들어가 『천기대경(天機大經)』등을 완성하고 이듬해 1월 1일에 원종(元宗)을 창립, 역사는 인격투쟁이므로 인물의 양성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원종주의가 전파되면 독립운동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역설했다. 1914년 안도현에 도전학교(道田學校), 장백현에 덕수(德水學校) 등을 설립한 선생은 북간도 일대에서 민족교육과 원종의 포교에 힘썼다. 선생의 독립운동 방략은 농촌을 근거지로 원종을 통한 사회결사·교육운동, 무장독립운동을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폐쇄적인 독시주의(獨是主義)였다. 1920년 11월에는 안도현 흥도자(興道子)에 무장투쟁단체인 대진단(大震團)을 조직하였다. 이듬해 가을, 화룡현 삼도구로 근거지를 이동한 선생은 원종을 강화하면서 입포강(入浦岡)학원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에 힘썼다. 이듬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향으로 축출된 뒤에도 국내에서 북간도의 원종교도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지령, 다수의 신도와 제자들이 정의군정사(正義軍政司)와 신민부(新民府), 북로군정서 등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에 신간회 등 민족통일전선운동이 고양되자 선생은 독시주의(獨是主義)를 포기하고 원종 종우회(宗友會)를 종우총연맹으로 개편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거주지 어복촌에 진우회(震友會)를 창립하고 농우동맹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길림구국군과 연합전선을 구축한 선생은 1932년 12월 동녕현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다수의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이청천의 한국독립군에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갈등을 빚은 선생은 협조강요를 거부하다가 1933년 3월 24일에 어복촌에서 죽음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