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사람에게 뿌리깊게 박힌 의식구조 중의 하나가 서열의식이다. 서열은 바로 한국인의 존재방식이며 서열에서의 이탈은 바로 한국사회로부터 파문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서열의식은 법이나 규칙이 없어도 한국사회의 질서를 유지해 온 원동력이요, 모럴의 핵심이었다. 어느 경영체나 정치집단에서는 누구의 줄을 타느냐의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만약 그 선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불안해하고 마냥 그 선을 찾아 어떻게든지 자기 자신을 그 끈에 매어 놓으려고 갖은 노력을 한다. 그 끈 속에서 서열이 정해지고 그 서열 속에서 상하 적당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기수를 따지고 입사연월을 따지고, 나이를 따지고, 생일까지 따져 서열을 매겨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지 않고는 원만한 인간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한 방에서도 앉는 장소에 따라 윗목 아랫목 서열이 정해져 있다. 신체까지 서열이 매겨져 있어 오른손이 우선이고 왼손은 천대를 받는다. 한 장소에서 회의할 때도 아무리 더워도 상관보다 상의를 먼저 벗으면 괘씸죄에 걸린다. 학생사이에도 1학년, 2학년, 3학년의 서열의식이 서구 어느 나라보다 강하여 학년이 성적이나 능력보다 선행된다. 능력이 인간관계의 서열에 의해 녹 다운되고 있는 곳이 한국사회이다. 서구사회는 개인적으로 규정된 규칙만 잘 지키고 주어진 임무만 완수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윗사람이나 동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또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고심할 필요도 없다. 남녀노소가 똑같이 이름을 서슴없이 부를 때, 우리에게는 천하 못된 놈들이 하는 짓으로 보인다. 이렇게 서구인은 수평적인 의식구조를 갖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수직적인 의식구조를 갖고 모든 사물을 수직적, 종적, 서열적으로 파악한다. 한국에서 순수한 학문의 토론, 곧 서양에서 성행하는 세미나는 불가능하다는 지론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 집회에는 선후배, 사제관계의 서열이 얽혀 있게 마련이고, 서열의식에 구애되어 선배나 스승의 의견에 이견이나 반발을 했다가는 그 사회에서 제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문의 발전이 더딘 이유중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행사를 주최하는 측에 있어서 가장 신경을 쓰게 만드는 부분이 자리배치이다. 서열에 따라 자리배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서열이 확연히 구분되는 경우에는 그래도 낫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누구의 자리를 먼저 놓아야 하느냐를 놓고 쓸데없는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게 된다. 서열이 만에 하나 잘못 배열되었다면, 당사자는 큰 모멸감과 함께 불쾌감을 느끼기 일쑤이다. 주최측은 당황할 수밖에 없고 행사의 의미는 퇴색되기 마련이다. 내실보다는 의전에 치우치다보니 행사의 질이 전체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서열의식이 우리사회의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보이지 않는 법으로 작용함으로써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으나 지나친 서열주의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형식주의에 메이다가 실리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의 전통적인 의식구조를 긍정적인 면은 지켜나가되, 너무 형식에 치우쳐 실리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국수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글로벌시대에 걸 맞는 세계적인 보편적인 사고와 행동을 따르는 것도 지구촌시대에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