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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3. 10. - 중국 일제 소주부대 탈출 7인(1)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03-03-03 00:00:00 2003.03.03 00:00:00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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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출신으로 일제 만행에 목숨걸고 항거한 김봉옥(金鳳玉학) 선열이 독립유공자 누락 사실이 알려져 그 연유가 의문시되고 있다. 더욱이 학병으로 끌려가 일제만행에 항거하며 탈출한 7인의 동지 가운데 5명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는데도 김봉옥 선열 등 2명만이 독립유공자에서 빠져있음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왜 그런지, 무엇 때문인지 의문을 풀기 위해 본란에서는 김봉옥 선열의 탈출과정을 토대로 목숨을 건 항일투쟁의 숭고함을 느끼며, 애국애족 정신의 위대함이 가득한 3월의 하늘을 다시 우러러 본다. 1943년 10월20일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가 만행의 종말을 보이기 시작했던 무렵 한민족에게는 굴욕적인 단말마적 조치가 단행된다. 일본 제국주의는 이날 조선인 학도 특별 지원병제도를 공포했다. 60년전 극악무도해진 일제는 1943년도 졸업생과 전문학교와 대학 재학중인 한국출신 학생들을 지원병이란 미명을 씌워 강제입대 시켰던 것이다. 군산에서 태어난 김봉옥 선열도 일본 중앙대학 법과 1학년에 재학중 이 지원병제도에 따라 끌려갔다. 그리고 중국 소주에서 학병생활을 하며 탈출의 기회를 보아오다 이른바 「7인의 탈출」 대열에 가담하게 된다. 각기 다른 부대 소속으로 있으면서도 외츨시간을 이용해 수차례의 접촉 끝에 탈출일을 1945년 3월10일로 정했다. 부대내 떠도는 이야기와 신병들이 지니고 오는 군수품의 형편을 보아 일본군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는 이들은 당시 3월10일이 일본육군기념일인데다 마침 간부후보생 교육이 끝나는 다음날이어서 외출이 허용될 것이란 점을 이용해 집단탈출의 거사일로 정했다. 집합장소는 소주의 서문교이었고, 시간은 오전 10시 정각, 복장은 완전무장에 탄환은 구할 수 있는대로 최대한 많이 지니고 탈출감행을 결의한 이들의 영웅적 탈출은 성공을 거뒀다. 거의 탈출이 불가능하리라고 판단했던 당시 소주부대에서 조선인 학병 7인의 집단탈출 소식은 학병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에게 영웅담이었고, 반면 일제의 추격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7인의 탈출은 단순한 부대 이탈이 아닌 항일투쟁이었음은 탈출계획시 완전무장에서 엿볼 수 있다. 이들 7인은 추격하는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고 그도 모자라 일본군 분견대를 기습해 일본군들을 사살하는 등 전설적 영웅담을 이어갔다. 일제 소주부대를 탈출한 ‘7인의 항일의거 영웅’은 ▲유재영(충남 금산) ▲김봉옥(전북 군산) ▲김영남(전남 완도) ▲박영(부산) ▲성동준(전남 순천) ▲정병훈(전북 진안) ▲최용덕(경남 남해) 애국지사이었다. 이들 7인의 탈출 후 항일의거 공적은 당시 우군으로 동참했던 중국 충의구국군 보고로 장개석 총통에게 전달됐고, 당시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통보됨에 따라 각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고 한다. 탈출에 완전 성공한 7인은 이후 광복군에 자진 입대해 항일전쟁을 계속 수행하다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들었고, 해방후 전원 무사 귀환해 각계각층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활약했다. 그 중 김봉옥 선열은 고향으로 돌아와 군산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며 미국유학을 도모하던 중 6.25를 만나 사망했다. 그런데 이들 7인중 5인은 독립유공자로 국가의 서훈을 받았지만 군산출신 김봉옥 선열 등 2명은 무슨 영문인지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서의 영예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 김봉옥 열사의 항일의거 행적을 찾아 7인의 탈출 동지인 유재영 전 전북교육감의 저서를 중심으로 소주부대 탈출의 의미를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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