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출신의 김봉옥 열사는 일본 중앙대학 법과 재학중 1944년 1월 20일, 일제가 발발시킨 2차대전 망상의 희생양으로 한국인 대학생들에게 특별지원병이란 미명을 붙여, 강제 입대시킨 전국 4천여명의 학병 속에 끼어 있었다. 살아서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 모를 길을 떠난 학병들은 입대후 일주일동안 예방접종과 정신훈련, 집중 도수훈련을 받느라 혼비백산하기 일쑤였다. 그 후 느닷없는 비상이 걸리고 열차에 올라탄 후 학병들은 한없이 북으로 향했다. 북으로 갈수록 사지에 가까이 다가감을 알기에 착잡한 심경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대 재배치와 행군이 이어지며 중국 땅을 밟은 학병들은 다시 기차를 타고 이동해 중국 양자강의 남쪽 경계인 소주(蘇州)에 도착했다. 소주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물과 미인의 도시로 낭만을 품고 있었겠지만 당시의 학병들에겐 머나먼 타국의 정처없는 발길에 불과했다. 일제 군인들과 섞여 부대가 재편성되고 혹독한 초년병 훈련이 시작되면서 학병들은 일본군들의 트집성 기합에 숱하게 시달렸다. 김봉옥 학병이 이 혹독한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기로 맘먹고 「7인의 탈주」에 합류하게 된 것은 이 탈출을 처음 도모한 류재영(층남 금산·해방후 전북 4대-5대 도교육감 역임) 동지와 사돈지간인 정병훈(전북 진안) 동지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류재영 동지는 이미 대구를 출발하면서부터 항일감정이 싹터 탈출을 꿈꿨고 정병훈 동지와 가까운 부대여서 상의하기가 쉬웠다. 어느날 정 동지가 같은 부대의 성동준(전남 순천) 동지를 소개했고, 이들 세명의 동지는 자주 만나 부대 탈주 계획을 세웠다. 탈주모의를 진행하던 중 최용덕(경남 남해) 동지가 탈주의사를 밝혔고, 김영남(전남 안도) 동지가 가세해 동지는 5명으로 불었다. 일본군 부대 탈주모의가 계속되던 중 정 동지는 류 동지에게 박영(부산)과 김봉옥(전북 군산) 학병이 탈주에 합류하고 싶다고 소개해 마침내 「7인의 탈주」 동지가 규합되었다. 어느덧 학병생활 1년이 될 무렵인 새 해 2월. 탈출을 감행키로 한 7인은 중국내 길 안내자인 교포 청년을 만나 탈출계획을 급진전시킬 수 있게되자 1945년 3월 10일 소주의 서문교에서 오전 10시 완전무장으로 만날 것을 결의했다. 이날은 10개월간의 간보후보교육이 끝나는 다음 날이자 일본 육군 기념일이어서 공휴일인 까닭에 다시없는 절호의 탈주 기회였다. 7인의 탈출동지는 거사일인 3월10일 약속장소인 소주 서문교의 한 음식점에 모였다. 그러나 류 동지와 최 동지가 뜻하지 않은 일로 2시간여 지체해 12시에야 모두 모여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국 학병 7인의 일본군부대 탈출 거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