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소주부대를 탈출한 한국 학병 7인이 만난 충의구국군은 중국 정규군 다음이자 장개석 총통 부인 송미령 여사가 이끄는 군대로 이들 유격대와 일군 습격에 성공하면 후방의 본부에 후송될 것이라고 왕지우 중국군 유격대장은 말했다. 마침내 7인의 동지가 탈출후 처음으로 일본군에 복수의 총을 겨누게 되었다. 일본어로 보초와 대화가 가능해 공격 대열 선봉에 서게된 7인은 공격 목표의 일본군 분견대로 한발한발 다가갔다. 토벌작전중인 일본군으로 위장작전을 써 보초를 처리한 탈출 7인과 중국 충의구국군 유격대는 일본군 병사로 일제히 뛰어들었고, 군산출신의 김봉옥 열사는 김영남 동지와 함께 병사에 총을 난사한 뒤 제2병사로 달려가 총소리에 놀라 대항하는 일본군들을 사살하는데 참여했다. 단 30분만에 기습공격은 성공을 거뒀고 소총 30정과 탄환 500발을 노획해 전원 무사히 귀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비교적 규모가 큰 분견대이었기에 노획한 무기 성능도 좋아 값진 전리품이 됐다. 7인의 동지가 참여할 다음 공격 목표는 일본군 최전선인 태호 근처 40여명의 치안경찰대였다. 김봉옥 열사는 유동지, 정동지, 최동지와 함께 공격대열 중간에 자리했다. 짙은 어둠 속 정막을 깨는 총성이 울리고 마침내 공격이 시작됐다. 30여분간의 사격 끝에 치안경찰대는 혼비백산해 달아났고 9명만 생포됐다. 일방적 승리였다. 일제 소총 40정과 탄약 두 상자를 노획했다. 2차례의 기습공격은 모두 성공했다. 재빨리 일본군 점령지역을 빠져 나온 7인의 동지는 대호라는 호수를 따라 소형민선을 타고 따라붙는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을 피했고, 현상금을 노린 일본군 앞잡이를 구국군 왕대장이 사살한 후 소주를 떠난 지 2주만에 충의구국군 사령부에 도착하게 됐다. 3일간의 심문이 이어졌고 마지초 대장의 환대를 받으며 1개소대의 호송병력과 함께 7인의 동지는 안전지대로 이동했다. 탈출 27일만에 제3전구 이준공 소장이 통솔하는 정치부대원이 돼 활동을 시작했다. 전황이 호전돼 도주하는 일본군 소탕작전에 참여하던 중 김봉옥 동지 등 탈출 7인은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특명을 받고 파견된 박시창 광복군 소장을 만나 광복군 입대를 권고 받았다. 전 대원은 광복군 입대에 합의했고 제1지대와 제2지대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