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출신 김봉옥 열사를 비롯한 탈출 7인의 동지가 광복군에 입대한지 3개월이 지날 무렵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45년 8울15일 일본은 마침내 무조건 항복했다. 이 때 7인의 동지는 상해에 도착해 만세장에 여장을 풀었고 일본군 무장해제와 임시정부 요원 상해공항도착 환영준비를 주도했다. 그리고 탈출할 때 소속부대였던 일본군 호고 제60사단 산하부대와 소주 2325부대의 무장해제를 감행했다. 이 후 김구 주석 등과 정식 인사를 나누었고 이청천·이범석 장군의 요청에 따라 상해의 광복군과 지원병, 학도병을 호강대학 교정에 집결시켜 사열·열병·분열식을 거행했다. 사열식을 마친 김봉옥 열사 등 7인은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김봉옥 열사는 귀국 후 혼란에 빠진 국내사정에 모든 것을 접고 국립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과에 들어가 영문학을 전공했다. 일본 중앙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가 다시 영문학을 위해 대학에 입학한 것이었다. 1949년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김봉옥 열사는 서울 경동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미국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모교인 군산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파던중 6.25사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동난중 불의의 선박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해방 58년여가 흐른 지금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가 목숨을 건 7인의 탈출 대열에 들어서 동지들과 함께 혁혁한 공을 세운 김봉옥 열사는 아직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않았다. 왜일까? 더욱이 탈출 7인의 동지중 5명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있어 납득하기 어렵다. 이에 김봉옥 열사의 친동생인 김봉원씨는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함으로써 김봉옥 열사가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도록 노력할 기회가 없었다며, 뒤늦게나마 지난 2000년 3월 관련서류를 갖춰 국가보훈처에 제출했다. 그러나 입증자료 불충분 등을 이유로 올해 3월 다시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한 서류를 보완해 국가보훈처에 제출해야만 했다. 7인의 동지가 똑같이 죽기를 각오하고 벌인, 그것도 전쟁터 한가운데서의, 항일투쟁이기에 5인이 독립유공자가 되었다면 나머지 2명도 두말할 나위 없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돼야 마땅하다. 이에 김봉옥 열사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하루속히 김봉옥 열사의 영전에 그의 동지들이 받았던 대통령표창과 애족장(愛族章)을 올려 추모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