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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르포 : 한민족 수난사 교토의 귀무덤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03-06-21 00:00:00 2003.06.21 00:00:00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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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411년이 지났다. 조선 정벌을 통한 대륙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일본 제국주의는 임진왜란과 2차 세계대전으로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짓밟고 깊은 상처를 남겼다. 세계 제2의 경제강대국으로 자리한 일본. 경제대국은 곧 군사대국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국력이 팽창되면 군국주의화로 치달아 대륙침략의 손톱을 세우는 일본의 과거사를 가벼이 넘길 수 없기에 본란에서는 군산지역 한 친목단체가 일본 교토의 귀무덤을 방문해 분향한 사례를 들어 6월 호국의 달 의미를 되새겨본다 2003년 6월13일 오후 4시경, 일본의 천년고도 교토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당인 도요쿠니 진쟈(豊國神社)에서 100여m 앞에는 우리 민족의 통한이 묻혀 있는 한 유적지가 자리해 있다. 그곳으로 군산지역 한 친목모임인 울타리회(회장 전팔현) 회원들이 분통함을 억누르는 마음으로 다가섰다. 임진왜란 당시 전과를 증거삼을 목적으로 무고한 우리 민족의 양민들마저 학살해 귀와 코를 베어간 왜군들의 만행을 상징하듯 만들어놓은 ?귀무덤(耳塚)? 앞에 선 것이다. 수십만명의 조선인이 희생된 귀무덤에 대한 관광안내자의 설명에 울타리회 일행은 숙연한 마음 가득 담아 무덤에 향촉대를 각각 놓고 참배하여 400여년전 희생된 한민족 선인들의 명복을 기원했다. 1592년 15만 대군으로 침공한 풍신수길의 대륙정벌 영욕이 조선 땅 호남권의 웅치(熊峙), 이치(利峙), 금산(錦山)전투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자 1597년 1월 다시 14만 대군을 보내 부산에 상륙해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당시 이순신 장군도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요, 호남이 없다면 곧 나라가 없어진다(湖南國家之保障 若 無湖南 是無國家)?라 할 정도로 호남의 저항이 거세자 풍신수길은 2차 침공에서 전라도민에 대한 앙심을 품고 천인공로할 학살을 지시했고, 이를 확인한다는 방편으로 죽인 조선인의 귀?코를 잘라 소금에 저려 보내라 했다 하니…. 새삼 귀무덤에 대한 유래를 떠올리고 나니 울타리회 일행은 더욱 가슴이 북받쳐 오르는 심정으로 귀무덤을 향해 합장했다. 무엇이 이런 민족의 비극을 다시 없게하는 일인지 너무도 분명히 알 수 있기에 한국인으로서 다짐하고 또 다짐해본다. 이를 지켜본 현지 관광안내인 윤현경씨(34)는 ?한국에서 많은 참배객들이 이곳 귀무덤을 찾았지만 이처럼 향촉대를 내며 엄숙한 참배를 하고 관리인인 일본인의 집까지 찾아가 관심을 보인 모습을 볼 수 없었다?며 한국인의 한사람으로서 모처럼 조국에 대한 애틋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관광안내인 윤씨는 대부분 참배객들이 설명을 듣고 간단한 묵념을 한 후 돌아가기 일쑤이고, 일부는 마치 400년이나 넘은 그 때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 듯 참배조차 하지 않고 딴전을 피우는 등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 귀무덤을 찾는 모든 한국인들이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잊지 말고 이중성을 지닌 일본을 올바로 알려는 노력의 산 역사자료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 또는 일본내 한국 대사관 등이 나서서 일본 현지의 관광안내원들이 귀무덤에 대한 사전 지식을 철저하게 갖도록 하고,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를 현지에서 처절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도록 국가적 관리가 어떤 형태로든 담겨졌으면 하는 심정이 든다. 일행은 귀무덤 근처에 살면서 매일 아침 7시 귀무덤 주변을 청소하고 오후 3시와 4시 사이에 분향하는 일본인 淸水四郞(90세) 옹의 집을 찾아갔다. 그에게서 사죄하는 일본인의 양심을 엿볼 수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淸水四郞 옹은 자신의 아버지 淸水伊三郞에 이어 100년이 넘게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만행을 반성하고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귀무덤을 돌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이 귀무덤 돌보는 일을 계속할 사람이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덧붙여 1990년 한국의 박삼중 스님(부산 자비사 주지)과 일본 왕족, 일본 큰스님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혼 환국안장추모대회를 가졌다고 말했다.(1990년 귀무덤은 경남 사천에 봉안됐다.) 울타리회 일행은 무거운 발길로 귀무덤을 남겨두고 떠났다. 왜구에 희생된 우리의 선조 영혼들이 언제까지 일부 속죄하는 일본인들의 분향 참배를 받아야 하는지…, 귀무덤 관리를 우리 후손들이 책임질 방도는 없는지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귀무덤 앞에서 치솟던 울분을 잊지 말고 우리 민족이 외세에 짓밟히는 치욕스런 일이 다시 없도록 일본의 우경화와 심해지는 망언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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