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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치욕 교토의 「귀무덤」 - (2)·끝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03-06-28 00:00:00 2003.06.28 00:00:00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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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의 국립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풍신수길의 신사가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천인공로 할 원수이지만 일본인들은 풍신수길이 일본을 부강하게 만든 영웅으로 여기며 웅장한 신사를 만들어 추앙하고 있는 곳이다. 그가 명령해 한반도를 침략한 왜군들이 무수한 조선인들을 무참히 살육하고 귀와 코를 베어 썩지 않게 처리해 증거물로 풍신수길에게 전달됐던 통한의 귀무덤이 풍신수길의 신사와 1분도 안되는 곳에 자리해 있음은 왜일까? 얼마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으로 한반도를 비롯 일본의 침탈을 당한 중국 등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내용중 귀무덤도 포함됐었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일본 풍신수길의 영토 욕심이 만들어낸 인류사의 비극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의 대부분 역사교과서에는 전쟁의 원인을 「명나라 정벌을 위해 조선의 길을 빌린 것」이라고 기술했다. 길을 빌린다는 왜군들이 한 짓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해 코와 귀를 베어?다는 이야기란 말인가?. 그래놓고도 모자라 반성을 하지 않는 다수의 우익성향 일인들은 이 귀무덤을 군사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탑」으로 둔갑시키느라 급급했다. 일본인 일부가 양심적으로 사죄하며 참배한다지만 대다수 우경성향의 일인들 눈에는 자신의 조상들이 세운 전승기념유물로 여겨지리라 생각하면 귀무덤을 보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피가 솟구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에는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상징하는 교토의 귀무덤과 함께 코무덤이 있다.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 양민들의 코를 베어 전과 보고용으로 사용했고, 훗날 오카야마현 비젠시에 코무덤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 코무덤이 국내에 알려지기는 1984년 일본에 유학중이던 부산외대 김문길 교수에 의해서 였다. 이를 1992년 11월 한많은 조선인의 영혼이 담긴 흙을 떠 도자기에 담아 부산 자비사에 임시 봉안한 후, 1년뒤인 1993년 11월 부안문화원 주관으로 임진왜란 비총 환국안장 추모사업위원회(위원장 박삼중 자비사 주지)에 의해 정유재란 당시 격전지였던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호벌치에 영면했다. 이 도쿄의 귀무덤(耳塚)과 오카야마현 비젠시의 코무덤(鼻塚)은 일본을 방문할 경우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들려야할 유적지이다. 그곳에서 우리민족의 치욕스런 역사를 되새기며 항일감정을 넘어 극일을 해야 하는 우리 민족의 사명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일본 내의 귀무덤과 코무덤의 영혼들은 환국안장 추모사업을 통해 1990년과 1992년 각각 모국으로 돌아갔지만 귀무덤과 코모덤이 세워져 있는 이곳에서 일본과 전쟁의 잔악상, 그리고 한민족의 치욕스런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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