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집 운영 28년만에 배달시킨 그릇을 깨끗이 씻어‘잘먹었습니다’라는 쪽지와 함께 봉투에 담아 밖에 내놓는 가정은 처음`이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릇을 보고 나는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고 내 직업에 대한 자긍심마저 일었어요. 난 그 댁에서 주문을 하면 더욱 더 정성을 다 해 솜씨를 내고 싶고 시키지 않은 음식을 더 가져다 주고 싶어져요. 그래서 하루는 탕수육 하나를 곁들여 보냈더니 다음날 온 가족이 저희 집을 찾아 주어 이젠 친숙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그래도 살 맛 나는 세상 아닙니까?” 내가 아는 어느 중국집 주인의 말이다. 이런 이야기가 내 귀에 번쩍 들어오는 것은 간단한 '배려의 마음'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진리를 또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음식배달문화가 발달한 나라도 없다고 하는데 돌려주는 그릇을 씻어서 내놓는다는 관습도 일반화되지 못한 터라 귀가 솔깃했던 것이다. 우리처럼 식사를 하고 난 뒤의 모습이 지저분한 나라도 없다. 심지어는 상위에 입속에 들어갔다 나온 뱉어놓은 음식과 새로 나오는 음식이 혼재해 있고, 먹은 그릇·재떨이· 소주병이 수북히 상위에 그대로 쌓여 있다. 치우는 종업원에게 한푼의 팁도 없으면서 난리를 쳐놓고 간다. 배려의 마음이 결여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먹은 그릇은 최소한 깨끗이 정리함으로써 '잘먹었다'는 무언의 의사표시는 음식을 내놓은 측에게 '손님들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마음을 들게 만든다. 이런 식당에서도 손님과 주인은 항상 이런 무언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너는 음식을 만들고 나는 그 음식을 먹고 돈 내고 가면 된다는 식의 단절된 커뮤니케이션은 이 사회를 삭막하고 무섭게 만들지언정 부드럽고 명랑하게 만들기 못한다. 외국에 나가보면 선진국일수록 남을 배려하는 지수가 높다. 건물의 출입문을 오갈 때 바로 뒷사람이 따라오면 그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문을 열어주는 것은 기본이다. '이타지수'가 높은 사람은 그 사람을 먼저 들여보내고 그 다음 자기가 들어가기도 한다. 소위 "After you" 정신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남이 뒤에 따라오든 말든 나만 들어가면 되고 문이 철렁 닫혀 뒷사람이 놀래거나 심지어는 다치는 경우도 발생한다. "After you" 가 아니라 "Only me" 이다. 한때 사회에서 '싹쓸이'라는 말이 유행할 때도 있었다. 한쪽 편에서는 다른 한쪽을 젼혀 고려함 없이 비로 쓸어버리듯이 전적으로 없애버리고 자기네들만 독주·독선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행태가 낳은 폐해는 우리 사회를 얼마나 후퇴시키고 삭막하게 만들었는가? 내 쪽이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는 자세는 모두를 발전시키지 못한다. 적당한 파트너십이 필요한 것이고, 그 파트너십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발생된다. 여름철을 맞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유원지에는 또 쓰레기더미가 쌓일 것이다(이렇게 점치고 있는 나도 잘못되었지만). 그것도 배려의 마음이 결핍된 결과이다. 쓰레기 치우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배려해준다면 내 쓰레기는 내가 가져와 버려야만 한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쓰레기 속에서 재밋게(?) 놀다와야 하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인간생활은 사회생활이고, 사회생활은 나와 남과의 의사소통의 생활이다. 남과의 의사소통이 안되고 있다는 것은 마치 죄인이 독방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부부지간·친구지간·이웃지간이 잘 지내기 위해서는 유언 또는 무언으로 어떤 형태로든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남과의 의사소통은 배려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럼 배려의 마음에서 출발한 의사소통의 단절은 곧 그 관계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돌려주는 음식그릇을 깨끗이 씻어준 P씨의 자녀는 음식주인에게 "잘 먹었습니다. 더운데 고생하십니다"라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고, 음식점 주인은 "손님 감사합니다. 이것 따뜻할 때 드셔보시죠"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표시한 간단한(?) 예는 콘크리트 벽으로 쳐진 우리사회의 단절된 관계를 무너뜨리면서 한층 부드럽고 정 있는 사회로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