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문득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고 풀벌레 소리가 뜰에 가득하다. 여름이 가면 자신도 사라질 것을 알았는지 몸서리치듯 울어대던, 라일락나무의 그 매미는 어디로 갔을까. 줄기차게 내리던 비에도 꿋꿋이 견뎌내더니…. 풀잎은 아직 초록을 자랑하지만 바람은 한결 선선하다. 한 뼘 열린 창(窓)을 타고 가을이 날아든다. 창은 계절을 열고 닫는 마음의 문인가 보다. 인간도 우주의 운행과 자연의 순환, 그 대 법칙 앞에서 예외일 수 없다. 사라진 매미에게서 인생의 무상함과 존귀함을 함께 배운다. 울음소리가 싫어 매미에게 행여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는지 지난여름을 돌아본다. 윤동주가 그랬듯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서시' 중에서) 바라지만 왠지 위선 같아 생각을 멈춘다. '욕심 없으면 바보 되는 이 세상'(이해인의 '몽당연필' 중에서)에서 그럴 수는 없어서일까. '찌르르,찌르르' 이어지는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풀잎에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가 지나 더욱 그렇다. 전화를 들다가도 오히려 '그리운 마음'이 더 쌓이도록 그만 내려놓는다. 불황의 어둠 속에서 묵묵히 소박하게 살아온 그들이다. 원래 가진 것 없었으니 살아 있으면 감사한 것이 아니냐던 가난한 마음이 애처롭고도 아름답다. 길다 못해 지리하던 장마후 모처럼 청명한 하늘이 푸른 속살을 드러냈다. 철 잊은 잦은 비에 우울해진 마음을 털어낸다. 초가을 하늘은 청포도처럼 싱그럽다. 저 푸르름에 '가을의 정수(精髓)'가 녹아 있다. 그것은 희망과 용기의 빛이요, 순결과 청량의 색깔이다. 찌든 마음을 그 빛으로 채울 수 있다면….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들아/슬픔의 힘으로,눈물의 힘으로/사랑보다 소중한 희망에 대하여 말하자'(권태원의 '희망' 끝 구절)는 시인의 노래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 지금은 가을 하늘 푸른 빛으로 내 안의 증오와 이기심, 좌절과 절망을 씻어낼 시간이다. 그리운 사람들아!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러 단풍 떨어질, 그때를 위해 '가을의 낭만'은 아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