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쌀 두 가마는 너무 큰 희생이었다. 평생 쌀 한 가마도 먹어보지 못했을 아버지다. 꽁보리밥조차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아버지의 꿈이 아니었던가? 그런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 마음속으로 다소 미안했지만 귀순이를 생각하면 지금 그딴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사실 단장 후보쯤 되면 공부도 잘 해야 한다. 어디 공부뿐이랴? 운동이 아니면 하다 못해 웅변이라도 잘해서 학교에서 이름깨나 있어야 한다. 만득이의 유일한 경력은 교내 마라톤 대회에서 입상한 것이 전부이고 보면 단장에 뽑힌다는 것은 기적일 것이다. 하지만 봉기는 쌀 두 가마니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보리 주면 참외 준다고 빵 사주면 표 주겠지 제 깐 놈들이 별수 있겠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학교에서 제일 잘난 놈을 뽑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표만 얻으면 된다. 아무나 잡고 매달렸다. 처음에는 비웃든 아이들도 하도 귀찮게 구니까 짜증 아닌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말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소리가 현실로다가 오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놈이 출마를 했다고 비웃기까지 하던 아이들이 하나둘 봉기 옆으로 몰려들기 시작 한 것이다. 선거 사무소가 학교 앞 빵집이 되었다. 봉기 옆에는 빵도 있었지만 이야기도 무성했다. 주로 다른 후보들의 이야기였는데 무슨 계집아이와 연애를 한다느니 친어머니가 아니고 기생 출신이라느니 터무니없는 모략성의 거짓 말들이었지만 빵을 얻어먹는 재미로 함께 낄낄대 주었다. 운동기간 이 길어지면서 봉기가 당선이 될지도 모른다고 소문이 나더니 그래서는 안된 다고 선생님들까지 걱정을 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결과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 다 물리치고 보란듯이 봉기가 당선이 된 것이다. 아버지가 동네 잔치를 벌렸다. 군청 서기를 자식으로 둔 아버지는 아까울 것도 없었지만 어깨가 한껏 높아졌다. 봉기 또한 삼일절 행사에 의기양양하게 완장을 차고 시네 행진을 했다. 어디선가 숨어서 늠름한 봉기를 보았을 귀순이도 이제 마음을 조금 달리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봉기 앞에 다시 다가 오지는 않았다. 안타깝고 애절했지만 세월은 자꾸 가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던 이조 판서 묘는 이제 그녀의 어머니와 양조장 김사장의 육체의 향연장으로 바뀌어 있을 뿐이었다. "군청서기는 언제 가냐?" "조금 더 기다려 보라고 합니다" "내가 교장선생을 만나볼거나?" 아버지는 쌀 두 가마니를 잊어먹지 않고 있었다. 봉기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버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군대를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군청은 어떻게 하고?" "군대를 다녀와야 된다는데요" "그럼 어서 다녀와야지" 아버지의 성화를 피하는 길은 군에 입대하는 길뿐이었다. 하지만 제대를 하고 와도 아버지는 쌀 두 가마로 얻은 호국단장의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또 군에 가 있는 동안 귀순이도 걱정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도망가듯 지원을 해서 입대를 했다. 막상 입대를 하고 보니 고된 훈련덕분인지 귀순이도 군청서기도 잠시 잊을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