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깨치고 나니 세상이 다시 보이고 자신감이 생겨서 하는 일마다 재밌어. 내가 휴대전화로 손주들에게 문자 보내면 애들이 냉큼 답장 보내주거든… 얼마나 재밌나 몰러.” 지난 5일 오전, 나운동 옛 KBS방송국 뒤편에 자리한 청학야학교 1단계 공부방에서 만난 할머니들의 자랑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우리말 공부에 풍덩 빠져있는 청학 할머니들에게 9일 한글날은 생일이나 다름없단다. 자신의 이름 석자도 모른 채 60평생 이상을 살아야만 했던 할머니들의 삶이 오죽했을까. “많이 배우면 인생이 드세다”고 학교 근처에도 못 가게 했던 집안 어르신들 때문에 늘 배움에 목말라야 했고, 보자기에 책을 둘둘 싸매고 학교에 가는 친구들이 세상에 더 없이 부러웠다는 이야기는 너도나도 모두 지닌 비밀 아닌 비밀이다. 그런 공감대를 공유해선지 이곳에만 오면 진짜 8살 동갑내기 친구들이 된 것 마냥 마음이 편안해지고 순수해진다고 한다. 부끄러운 맘도 서러운 맘도 모두 잊은 채 홍인자(67) 할머니가 학교가 하도 가고 싶어 막내 동생을 들쳐 업고 학교 창문에서 공부하는 걸 훔쳐보다 경비아저씨에게 도둑으로 몰려 혼쭐났던 이야기를 하자, 박분례(66) 할머니가 학교 보내달라고 떼쓰다 부지깽이로 얻어맞고 광에서 잤다는 이야기를 개선장군처럼 풀어냈다. 심은자(59) 할머니는 등굣길에 만나는 동네사람들에게 아르바이트 하러 간다며 거짓말을 한다. 늦게 배우는 일이 잘 못된 것도 아닌데 괜스레 부끄럽고 죄지은 기분이라서 그렇다. 이처럼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지난날의 아픔을 이렇게 울며 웃으며 이야기하는 청학 할머니들. 이들에게 우상이 있으니 바로 전숙자(69) 할머니다. 전 할머니는 현재 청학 1단계 공부방의 자원봉사 선생님으로 활동 중이다. 청학 할머니들이 전 할머니를 부러워하는 것은 불과 9년 전만 해도 하 할머니 역시 문맹이었기 때문이다. 환갑을 맞던 2000년, 전 할머니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물어물어 청학을 찾아와 한글공부를 시작했다. 방금 들었던 것도 돌아서면 잊어버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이 할머니를 계속 공부하게 만들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중입검정고시를 합격, 평화중학교와 도립여고를 졸업하고, 현재는 서해대 사회복지학과에 다니면서 봉사하고 있다.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는 전 할머니는 “많이 배운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는데, 이제 배울 만큼 배워 배운 것을 나눠주는 입장이 되었으니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어딨느냐”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인다. 늦게 배우는 이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전 할머니의 설명은 귀에 쏙쏙 박힌다며 할머니 학생들이 자랑한다. 박미애 사무국장은 “어르신들의 배움에 대한 기쁨도 크겠지만, 친구들을 만나는 재미나 학창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학교생활에도 큰 재미를 느낀다”며 “경쟁심 또한 대단해서 서로 공부 안했다며 엄살 부리는 모습이 평범한 학생들과 똑같다”고 말한다. 965년 3월 설립된 군산청학야학교는 초기에는 글을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학습기회를 주기 위해 시작했으나 1990년대부터는 60대 이상 노인층을 위한 한글반을 개설, 20여년동안 이곳에서 한글을 깨친 노인들만 1500여명에 달한다. 또 이 가운데 초·중등과정 검정고시까지 합격한 노인들도 다수다. 그러나 지난 3일 교실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의 매입자가 한 달 내에 비워줄 것을 요구해 82명의 학생들과 교사 5명은 좌불안석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들의 배움의 공간이 새롭게 마련돼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