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계를 잃어버렸다. 아파서 손해, 잃어서 손해. 눈에는 맨 시계만 보인다. 이 귀퉁 저 귀퉁 찾아보아도 없다. 시계를 잃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며느리한테 선물 받은 시계인데 어느 기회를 보아서 말을 해야 되겠지. 그거 아니라도 팔월 명절은 돌아오는데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내 마음은 우울하다. <일기 1994년 9월 7일 진달래 2반 황성례 > “이게 정말 내가 쓴 일기여?” 19년 전 자신이 쓴 일기를 읽고 황성례(84) 할머니는 어린아이마냥 신기해했다. 21년 전 어찌해서 우리배움터에 오게 됐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황 할머니는 한글날을 맞아 막내딸 이정신(52 우리배움터 교사)씨의 손을 잡고 새롭게 이전한 학교를 방문했다. 자신이 배우던 곳에서 막내딸이 교사로 일한다는 말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선 것. 황 할머니는 새롭게 단장한 학교 내부를 둘러보고 앨범을 뒤적이면서도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앨범 속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20여 년 전 황 할머니는 곱디고운데 앨범을 넘기는 황 할머니는 백발의 노인이 돼 있다. 그래도 그때 그 시절 한글을 배워둔 덕에 일기도 꾸준히 썼고, 가끔 편지도 쓰게 됐다. 교회에 가선 당당히 성경책을 펴고 찬송가를 보고 부를 수 있게 됐다. 또 무료한 시간엔 책을 베껴 쓰면서 심심함을 달래기도 한다. 이전엔 상상도 하지 못한 생활이다. 황 할머니는 “한글을 몰라 당한 설움이 어디 한 두 가지겠어. 눈을 뜨나 감으나 마찬가지지. 아이들 이름을 구별할 줄 아나, 외상 장부를 볼 줄 아나, 돈을 셀 줄 아나?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였다”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글을 몰라 어디 가는 버스냐고 묻는 게 두려워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던 황 할머니는 지금도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는 행동은 일체 하지 않는다. 자식이 공부하는 학교에 찾아가고 싶어도 행여 못 배운 엄마가 실수라도 해서 자식에게 상처를 줄까봐 가지 못했다. 누가 이름 석 자 전화번호만 적어 달래도 이 핑계 저 핑계 거짓말을 하느라 얼굴 붉어진 일도 많았다. 공부하다 답답하면 빚이라도 내서 실력을 사고 싶다는 푸념도 했다. 글을 모른다는 건 그렇게 사소한 일에서부터 아픔을 느끼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글을 몰라 답답했던 황 할머니는 환갑을 훌쩍 넘겨서야 한을 풀게 됐다고. 남편과 자녀들 몰래 우리배움터를 다니면서 조금씩 한글에 눈을 뜨게 됐다. 복습을 해야 실력이 늘 텐데 숨기고 있자니 영 답답했다. 이후 공부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틈만 나면 딸과 손주들을 졸라 복습했다. 문제를 풀다 잘 되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공부욕심이 대단했던 황 할머니는 성적이 우수하고 타의 모범이 돼 반장과 학생회장을 맡아 어린 교사와 나이 든 학생들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 돼 황 할머니의 남편이 신부전증으로 쓰러져 병수발에 장사와 살림까지 하면서 시간이 모자라는 데도 황 할머니는 하루도 빼지 않고 출석하는 열정을 보였다. 한글을 깨치는 즐거움에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고, 그 즐거움 덕에 병수발도 힘들게 여기지 않았던 것. 황 할머니는 “한글 배운 덕분에 한 20년 즐겁게 보냈지.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싶은데 그게 답답하다”고 말했다. 연로한 탓에 이제 기력도 떨어지고 행동도 느려져 더 이상 학교에 나올 수 없게 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황 할머니의 딸 이씨는 “엄마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 일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한글은 삶에 지쳐 외로움과 싸우던 수많은 어르신들에게 기적을 만들어 내는 열쇠”라고 설명했다. 이에 황 할머니는 “한글을 배우는 것을 앞을 못 보는 맹인이 볼 수 있는 광명 같은 큰 기쁨”이라면서 “우리 막내가 나 같은 사람들 구제하는 일을 한다니 기쁘다”며 엷은 미소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