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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민과 함께하는 군산학(3)

고종 14년(1877) 9월 花房義質이 일본의 대리공사로 부임해오면서 서해안의 항구를 개항시키기기 위해 인천, 군산, 남양, 해미, 진강, 진도, 목포 등을 후보지로 거론하였으나 군산을 비롯한 서해안 항구들은 수도와 거리가 멀고 항만 사정이 나쁘다는 이유로 제외되고 1881&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14-12-26 10:24:58 2014.12.26 10:24:58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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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산의 개항  고종 14년(1877) 9월 花房義質이 일본의 대리공사로 부임해오면서 서해안의 항구를 개항시키기기 위해 인천, 군산, 남양, 해미, 진강, 진도, 목포 등을 후보지로 거론하였으나 군산을 비롯한 서해안 항구들은 수도와 거리가 멀고 항만 사정이 나쁘다는 이유로 제외되고 1881년 인천이 개항지로 결정되었다. 1894년 7월 일본과 밀약으로 ‘暫定合同條款’ 체결7개 항목으로 구성된 조관은 제4항에서 ‘장래 양국의 交誼를 더욱 친밀히 하고 또 무역을 장려하기 위하여 조선정부는 전라도 연해의 땅에 通商口岸 一處를 개항할 것’ 이라고 규정하여 전라도 연안의 통상항 개항을 명문화하였다. 그러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지연되었다가 1897년 2월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1897년 10월 대한제국 성립된 후 1898년 5월 26일 군산, 마산, 성진의 개항을 결정하였다. 대한제국 정부가 군산 개항을 결정하게 된 것은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대한제국 성립 이후 고종의 생존 전략인 제국주의 열강간의 세력 균형 정책의 일환으로 군산 개항이 이루어졌다. 둘째, 독립협회 계열 인사들의 자유무역주의 주장도 군산 개항의 배경이 되었다. 독립신문에 소개된 군산 개항의 이로움 다섯 가지를 보면 1. 외국 물건이 들어와도 강제로 파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고려하여 살터이니 우리에게 이익은 많고 해는 적으며 2. 백성들이 쓰고 남은 물건을 수출하여 돈을 버는 것은 좋은 일이며 3. 외국 자본이 들어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자리가 생길 것이고 4. 만일 국가가 잘못될 경우 스스로 개항하는 것이 청국처럼 강제로 개항당하는 것보다 나으며 5. 흉년이 들 경우 곡물 수입에 편리하다는 것이다. 셋째. 군산이 개항하게 된 데에는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 문제와 해관 총세무사 브라운의 영향력도 크게 작용하였다. 당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대한제국 정부는 개항장을 확대함으로서 얻게 될 관세 수입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해관 총세무사 브라운의 개항에 대한 권고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의 자발적인 개항에도 불구하고 군산 개항 이후 주변지역은 일제의 수탈지로 전락하여 상대적으로 정체를 면하지 못하였다. 군산 개항이 당시 주변 지역에 미친 영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군산 개항 이후 우리나라 최고의 곡창지대인 전북지역 쌀의 일본 유출이 증가하였다. 산업화를 추진하고 있던 일본은 많은 양의 조선 쌀을 헐값에 사들일 필요가 있었고 군산은 그 목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둘째 군산항의 개항은 금강 유역의 재래시장 구조에 변화를 가져왔다. 개항 이전 금강 연안에서는 강경을 중심으로 한 유통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산 개항 이후 상인들은 강경을 거치지 않고 군산과 직접 거래하기 시작하였고 금강 하류 일대는 군산을 중심으로 상품 유통이 이루어졌다. 셋째, 개항 이후 군산과 그 주변 지역은 일본인의 토지 침탈의 표적이 되었다. 일본과 비교해서 토지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토지이윤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군산 지역은 일본인의 토지 침탈이 집중되었다.  2. 거류지의 설정과 일본인 거류민의 증가  개항 당시 군산은 5, 6개의 구릉 기슭에 약 150여 가옥이 산재한 비교적 한적한 지역이었다. 다만 경장시장을 중심으로 충청남도 서천 방면과 강경에 이르는 금강 연안 교역이 이루어지는 정도였다. 그런데 개항과 함께 군산에는 감리서, 경무서, 세관 등이 설치되는가 하면 외국인 거류지가 설치됨으로서 그에 따라 외국인, 특히 일본인 거류민이 증가하였다. 군산 개항 전부터 이미 거류민회를 조직하였던 일본인이 거의 전적으로 각국 거류민회를 운영하였다. 이들은 조선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거류지역을 거류민들에게 경쟁 입찰시키는가 하면, 군산주재 일본 영사의 비호를 받으면서 농산물을 매점매석하는 특권을 누리며 이득을 남겼다. 개항 이후부터 1910년까지 군산 내 인구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일제하 군산 지역의 인구변화 단위 : 명   조 선 인 일 본 인 기타 외국인 합 계 1899 1900 1905 1910 1915 1920 1925 1930 511 780 3,451 3,830 5,561 8,243 13,486 16,541 77 422 1,620 3,488 5,291 5,659 7,074 8,781   24 85 95 147 249 462 580 588 1,226 4,156 7,373 10,965 14,138 20,699 26,538 자료: 군산시사(1991)  군산에 거주한 일본인은 대부분은 미곡무역과 관계된 일에 종사하였다. 이들의 숫자는 개항 후 10년 만에 급증하여 1910년에는 군산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이처럼 군산에 많은 일본인이 거주한 것은 수출입에 유리한 항구 도시라는 점과 김제 등 배후의 넓은 곡창지대를 장악한 일본인 대농장주들이 군산항을 통해 쌀을 쉽게 일본으로 실어낼 수 있었던 점 때문이었다. 위의 표를 보면 군산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수 역시 급증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일본인이 농장을 확대해나가는 과정에서 농촌에서 더 이상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군산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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