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항 이후 생긴 변화들 1) 서양식 학교와 병원의 건립 개항 후 국내에 들어온 기독교 여러 파 가운데 군산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편 것은 미국 예수교 장로파였다. 젼킨(Junkin) 목사는 군산항에 일본인이 모여들자 구암 지역에 선교부를 세우고 1902년 자기 집 사랑채에서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뒤에 군산 영명학교가 되었고, 다시 소녀를 모아 교육시키면서 멜본딘여학교가 되었다. 군산에 서양식 병원이 처음 세워진 것은 1895년 드루(Drew)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집 사랑채에 진료소를 열어 환자를 치료하였고 그가 귀국한 후에는 1902년 부임한 알렉산더(Alexander)가 의료 활동을 이어갔다. 1906년 귀국한 알렉산더는 군산지역 의료 선교를 위해 막대한 기금을 모아서 보내왔고, 이 기금으로 새 건물이 신축되었다. 이것이 군산구암병원으로 당시 호남에서 가장 큰 병원이었다. 1910년 군산에 온 패터슨(Petterson) 선교사는 군산을 거점으로 진료에 전념하는 한편 순회 진료도 시행하였다. 2) 우체국 개설 및 신문 발행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인해 중단된 우편사업이 재개된 것은 1895년이다. 이 해 5월 서울과 인천 사이에만 시행하던 우편 사업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한 정부는 23개 부청 소재지에 우체사를 세웠는데 군산에는 1901년 군산우편국이 문을 열었다. 전화는 1906년 군산우편국에서 전화 통화업무를 취급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군산에서 처음 발간된 신문은 1902년 일본인이 창간한 주간지 <群山新報>이다. 이 신문은 1905년 12월부터는 격일간으로 간행되다가 1908년 4월 <군산일보>로 개칭하고 일간지로 발행되었다. 1903년 군산에서 일본인이 <韓南日報>를 간행하였으나 곧 폐간되었다. 이 신문들은 모두 군산의 일본인 거류민을 위해 만들어졌다. 3) 금융기관과 공장의 설립 군산에 세워진 최초의 금융기관은 1903년 3월 제일은행 군산출장소이다. 이는 식민지 은행으로서 전북에 처음 진출한 금융기관이기도 하다. 제일은행으로서는 1878년 부산에 지점을 개설한 이래 여섯 번째 지점이 된다. 제일은행은 원래 보통은행이었는데 조선에 진출해서는 중앙은행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1907년 4월에는 일본의 십팔은행이 군산에 지점을 개설하여 미곡 무역 금융을 담당하였다. 개항 이후 군산에는 정미소와 양조장 등 쌀과 관련된 공장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1899년에 세워진 上野주조장을 시작으로 岩本주조장(1899), 赤松장유양조장(1908), 香原주조장(1909), 花岡정미소(1918), 長田정미소(1924), 加藤정미소(1933) 등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 철공소, 농구 제작, 고무공장, 연와공장 등이 있었으나 그 규모는 비교적 영세하였다. 4) 전군가로와 호남선 개설 군산 개항 이전에 물산은 강경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따라 내려가 인천으로 수송되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강경을 거치지 않고 군산항으로 직접 모여 인천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주변 지역, 특히 전주에서 군산까지의 길은 너무 좁아서 물자를 수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주 군산간 도로의 확장 개설이 요구되었다. 더구나 전주 군산간 도로를 개설하자는 데에는 그 주변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인 농장의 물자와 양곡을 수송하는데 절대적으로 도로가 필요하다는 배경이 있었다. 1907년 5월 정부는 전주에 治道局 출장소를 내고 전주 – 군산 사이의 도로확장 공사를 시작하여서 1908년 10월 완료되었다. 이것은 전북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대규모 토목 공사였다. 덕진을 기점으로 동산촌 - 대장촌 - 목천포 - 대야 - 군산에 이르는 노폭 7m, 총길이 46.4Km의 전군가로가 개통함으로서 전주 – 강경 노선은 급격히 쇠퇴하여 강경이 크게 위축된 반면 군산은 상업 중심지로 더욱 발전하였다. 한편 군산, 목포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일본이 그 지역을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할 것을 열렬하게 청원하였다. 그들은 철도가 통과할 전라도가 양곡이 풍부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의병의 진압과 면화의 반출을 위해서도 철도의 건설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전주의 東山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三菱에서는 이미 1907년부터 철도 부설을 계획하고 개별적으로 측량 기사를 일본에서 불러와 측량을 한 일이 있었다. 측량 후에는 바로 ‘호남선 철도 기성회’를 발족시키기까지 하였다. 三菱의 철도 유치활동에 공주·전주에서는 반대하였지만 군산에서는 철도 유치에 적극적이었다. 1910년 6월 철도국장관 大屋權平이 ‘호남선철도부설안’을 제국의회에 제출하였고 일본정부와 한국 통감부는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단 호남선의 노선을 선정하였다. 조치원을 기점으로 공주, 논산, 강경, 전주, 김제를 거쳐 목포까지 연결하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大倉이 군산에서(대야역), 岩崎(三菱系)는 전주에서(삼례역) 유치운동을 벌이면서 철도국장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결국 군산과 전주의 중간 지점인 이리를 통과하는 안으로 결정하고 이리∼군산간 지선을 본선과 동시 착공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호남선은 본선 261.5km로 대전~가수원~두계~논산~강경~이리~김제~광주~송정리~영산포~목포를 통과하고 지선은 24.8km로 이리~군산을 연결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직후인 1910년 10월부터 호남선의 부서공사에 착수하여 1914년 1월에 이를 완공하였다. 4. 맺음말 개항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군산의 역사는 ‘수탈과 개발’이라는 말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개항과 더불어 군산은 일본인의 토지 점탈, 쌀의 집산 · 이출항구로서 기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수탈과 그로 인한 지역민의 수난의 역사만으로 점철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 지역민들은 일제에 대해 줄기차게 항거하였으니 항만노동자, 정미노동자, 농민의 항쟁의 역사도 군산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