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산을 출발한 시위대는 처음 군산영명학교 교사와 학생이 앞장서자 맬본딘여학교 학생들과 구암교회 교인, 궁멀 예수병원 직원들, 시민 등이 가세해 서래장터(현 경암교 인근)에 이르러 500여영이 되었고, 왜경들이 영명학교 교사들을 연행해간 당시 경찰서(현 구 군산경찰서) 앞에 이르렀을 때는 1천여명에 달했다 한다. 당시 군산의 인구가 한국인 6천581명, 일본인 6천809명, 외국인 214명 등 총 1만3천604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의 시위대였다. 또 군산시민 가운데 한국인들이 평균 4차례 이상 시위에 참가했으니, 당시 군산 선열들의 가슴에 담긴 구국의 일념이 얼마나 애틋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기미년 항일시위 결과 53명이 사망했고 72명이 실종됐으며, 195명이 피해를 입었다. 수많은 선열들이 옥고를 치렀고 왜경의 총칼 앞에 무참히 짓밟히면서도 ꡒ대한독립만세ꡓ의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이토록 숭고한 선열들의 희생이 밑받침돼 오늘의 군산이 열린 것이다. 군산의 3.5항일 거사는 한강이남 최초의 거사이자 전북지역 최다 순국자가 발생한 항일시위여서 군산의 자존심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우리는 올바로 계승하지 못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선열들의 뜻을 받들어 눈부신 군산발전을 이루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뒤로한 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하는 일부 모습들이 씁쓸함만 던져준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많은 군산 3.5독립만세운동의 발원지 구암산을 방치해 놓은 것이다. 훌륭한 정신문화를 올바르게 정립해 후세들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할 때 비로소 진한 애향심이 생겨나고 이를 밑바탕으로 애국애족의 정신이 내재되는 것임을 감안 할 때 군산의 정신들을 올바로 정립해 왔는지 심각하게 반성해 볼일이다. 구암산 성역화의 시도는 지방자치시대에 들어서 1996년 「구암 3.1운동 민족동산 조성 타당성 검토 및 개발구상」 용역을 마쳤고, 이후 막대한 사업비 마련이 어려워 유야무야 하는 사이 선거가 있을 때마다 구암산 성역화는 선거공약으로 이용되기만 하는 애처로운 실정에 처해 있다. 최근 군산시는 구암산 일대의 공원화 계획을 발표했지만 예산이 세워지지 않아 다시 또 공염불이 될 공산이 크다. 올해도 구암산 성역화를 바라는 군산3.5독립만세 시위대는 3.1절 아침에 구암산을 출발해 당시 선열들의 애국혼을 기리며 항일 만세시위 재현행사를 벌일 준비를 마쳤다. 군산3.1운동 기념사업회(회장 윤창렬 구암교회 목사)는 3.1절 86주년을 맞아 군산3.5독립만세운동 기념시민대회로 항일시위 재현에 이어 오전 10시 군산시청 대회의실에서 기념식을 갖고 전국 백일장․미술대회(오후 1시-5시 구암교회)와 청소년평화제(오후 3시-5시 군산시민문화회관), 기념역사사진전(3월6일까지 군산3.1운동 선교기념타워) 등을 펼친다. 이러한 항일 만세시위 재현행사 등은 구암산 성역화의 염원을 담은 것이어서 구암산 성역화를 하루속히 이루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지역의 역사를 알리는 교육장 등으로 활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