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신시도배수관문관리사무실에서 열린 군산야미도 수중발굴 유물 공개 현장.> 군산 앞바다의 해저유물 발굴은 난파선들의 무덤으로서 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사적인 의미도 대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내달이면 야미도 해저유물 작업을 끝으로 7년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 2002년 ‘그날’ 이후 = 2002년 '그날'이후 '난파선들의 무덤'으로 불리는 고군산군도(군산시 옥도면소재) 앞바다는 고려청자의 보고로 떠올랐다. 시작은 아주 우연한 사고였다. 지난 2002년 4월 6일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 해상에서 9t짜리 소형 저인망어선으로 고기를 잡던 한 어민의 그물에 고려청자 243점이 무더기로 올라왔다. 질이 좋은 12세기 고려청자였다. 화들짝 놀란 문화재청은 지역 언론 등으로부터 또 다른 고려청자 발굴 가능성이 제기됨에 따라 서둘러 발굴조사에 나섰고 문화재청 소속 목포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비안도 앞바다에서 2년여 동안 청자앵와문 접시 등 3192점의 청자를 건져 올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1년 뒤인 2003년 9월,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비안도로부터 40km 떨어진 옥도면 십이동파도 앞바다에서 11~12세기 것으로 보이는 옛날 배와 보물 8121점을 건져냈다. 뻘 속에서 약 9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청자는 육지에서 풍상을 겪은 물건들보다 상태가 훨씬 좋았고빼어났다. 그러면 군산 앞바다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해저유물은 얼마나 될까. 시와 문화재청에 따르면 전체 군산 앞바다 해저유물규모는 비안도 해역 3192점을 비롯 십이동파도 해역 8121점, 야미도 해역 3364점 등 모두 1만5300여점에 이르는 것으로 잠정집계됐다. 군산앞바다의 수중발굴작업의 대미를 장식할 야미도 수중발굴은 2005년 11월 2일 남대문경찰서에서 야미도 도굴유물 판매 피의자가 구속되면서부터. 문화재청과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등은 긴급탐사에 나섰고 그해 11월 청자대접 25점을 발굴한데 이어 △ 2006년 4~5월 755점 △ 2007년 6월 1026점 △ 2008년 이후 1558점 등을 수중발굴했다. 야미도해역은 그동안 수중문화재 발굴조사구역 사적 가지정으로 2006년 6월부터 6회 연장했고 오는 6월이면 마무리될 예정이다. ◇ 고군산군도의 해저유물 발굴과정 및 의미 = 느닷없이 군산 앞바다에서 보물선이 떠오르게 된 것은 오로지 새만금 간척사업 덕분이다. 농촌공사는 새만금 방조제를 만들면서 동진강과 만경강 물이 서해로 흘러들 수 있도록 비안도 앞 가력배수갑문과 신시도 배수갑문에 각각 하나씩 물길을 틔워 놨다. 하루에 두 번씩 밀리고 쓸리는 바닷물은 좁은 물목을 통해 수백년 동안 켜켜이 쌓여온 뻘 층을 파헤쳤고 뻘 속에 잠자고 있던 보물들이 어부들의 그물에 걸려 나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섬 주민들은 처음에는 이따금 그물에 쓸려 올라오는 청자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2002년 4월 역사 속으로 보물들의 속살이 나온 것이다. 군산앞바다 수중발굴 중 가장 의미 있는 곳은 십이동파도 근해에서 발견된 청자들로 평가된다. 특히 2003년 10월 발굴에서 배에 실을 때 일렬로 포개면서 짚이나 나무 등으로 깨지는 것을 방지한 도자기 포장법이 바로 그 것이다. 이곳의 청자들은 대부분 고려 때 관청에서 쓰던 생활청자라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고려청자라고 하면 대부분 왕실의 장식용으로 평가돼 왔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의의로는 1976년 신안 해저유물 발굴이후 서해 비안도 해저에서 발굴 인양된 것 중 가장 초기의 청자들과 12세기 배를 복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밖에도 군산 앞바다에서 이처럼 도자기가 인양된 것은 강진과 해남, 부안 등의 청자제작지에서 만든 공납용 청자들이 조운선을 통해 개경을 향해 오다가 물살이 세고 거친 곳에서 난파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 진다. 즉 조운선의 운반경로가 밝혀진 것이다. 군산 앞바다의 해저유물 발굴은 고려 12세기 초의 청자의 양생과 선적방법, 그리고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해양고고학의 유적과 유물을 발굴했다는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수중발굴의 시험장 '서해바다'= 국내 최초의 수중발굴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년에 걸쳐 이뤄진 전남 신안군 해저유물 발굴. 14세기 초 이곳에서 침몰한 200톤급 중국 무역선을 비롯 중국도자기 등 2만여점의 유물을 찾아낸 수중 발굴의 쾌거였다. 이 위대한 발굴도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가 걸리면서 시작됐다. 국내에서의 수중발굴은 대부분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이뤄진 것. 실제로 1995년 전남 무안군 도리포 앞바다에서 청자 600여점 발굴, 2002년 군산시 비안도 앞바다와 2004년 군산시 십이동파도 앞바다에서 청자 1만여점 발굴, 2007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충남 태안 마도 앞바다 등 국내의 수중 발굴은 대부분 서해에서 이뤄졌다. 이처럼 서해바다에서 청자가 끊임없이 발견되는 이유는 뭘까. 부안과 전남 강진은 고려청자의 대표적 도요지였다. 이곳에서 만든 청자를 고려 때 수도였던 개경으로 운반하던 도중, 배가 침몰하면서 청자들이 바다 속에 가라앉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수중 발굴은 문화재청과 경찰은 전문 수중 도굴꾼인 머구리들과의 쫓고 쫓기는 싸움판 다름아니었다. 수중 발굴은 도굴꾼들과 전쟁을 통해 발전해왔다. 우리나라 첫 수중발굴인 신안 해저발굴이 이뤄질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원시적이었지만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엄청난 기술적인 진보가 이뤄졌다. ◇ 향후 과제는 = 군산앞바다에서 발굴된 유물은 국립해양유물전시관과 전주국립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고 출토 해저유물은 국가에 귀속된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바다와 땅 속에서 나온 유물은 모두 국가 소유다. 이 때문에 내년이후 개관될 군산시립박물관에 이관하기 위한 임대절차를 밟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을 뿐 아니라 발굴 지역이 일부 남아 있어 과연 완벽한 발굴을 끝냈는지도 의문이다. 즉 전문도굴꾼들의 비밀스런 작업이나 묻혀있는 지역까지 마무리됐는지도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4일 오전 신시도배수관문관리사무실에서 군산야미도 수중발굴 유물 공개 설명회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