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양주·청주·소주 등을 생산한 종합 술 산업의 중심지 고 강정준 백화회장, 고 고판남 세풍그룹회장 등 지역경제 거두(巨頭) 숨결 남아 <과거 백화의 청주공장이 있었던 현대 오솔 아파트> 술이나 간장을 생산하는 양조산업은 보통 항구도시를 거점으로 발전한다. 프랑스의 고급 와인을 대표하는 생산지 보르도가 최적의 포도농사에 적합한 기후와 토양 뿐 만 아니라 그 지형의 완만함으로 인해 '달의 항구'라고 불리는 항구를 거점으로 한다는 것은 특이할 만하다. 칠레의 와인 또한 항구도시 산티아고를 거점으로 발전했다. 미국의 맥주산업의 중심지인 위스콘신 주 동부의 밀워키도 항구도시다. 금속․ 자동차․ 건설기계 등의 산업도 유명하지만 이 지역을 대표하는 프로야구팀의 이름이 밀워키 브루어스(Milwaukee Brewers(양조업자들))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항구는 양조산업의 최적지다. 큰 강이 흘러 바다로 이어진다는 것은 너른 평야지대의 곡창을 옆에 낀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수확된 미곡이 항구로 빠르게 운송돼 신속한 가공을 거침으로써 양질의 재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우 마산이 1899년 개항된 이후 술과 간장을 만드는 양조사업의 중심지로 떠오른 바 있으며 군산도 1906년 이후 일본인들의 경제적 지배가 강화되면서 양조산업이 시작됐고 발달했다. 물론 인천지역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군산에 이주해 온 일본인들은 대체로 생계형이었다. 그들은 행상이나 소매점을 통해 일제 잡화나 주류를 다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양조산업에도 손을 뻗쳤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으로 미곡 수탈량이 증대하는데,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서 잘 표현되었듯 군산지역이 특히 양조산업의 중심지였다. 일본인은 술의 원료가 되는 쌀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또한 양질이 생산되는 호남평야와 인접한 군산에서 양조공장과 주류 판매점을 독점적으로 확대해 갔다. 군산의 양조장들은 각 읍면별로도 있었지만 시내권에는 고려주조장, 신흥주조장, 미룡주조장 등이 대표적이었다. 해방을 맞아 고 강정준(호원대 설립자) 회장이 백화를 설립하면서 군산이 현대적인 의미의 양조산업으로 한 차원 높게 성장, 발달한다. 고인이 된 강 회장은 해방 후 열악한 국내 양조산업을 현대화시킨 주인공이다. 백화의 산실은 월명동 오솔아파트 부지와 금동 동신아파트, 다원파크빌 부지 등이다. 본래 강 회장은 대한양조였지만 상표와 회사명이 다르다고 해서 회사명을 바꿨다. 강 회장은 이 과정에서 '조화'라는 회사명에 애착을 보였지만 논산의 동종 사업가와 분쟁에서 어려움을 겪자 '백화(白花)양조'로 정하고 본격적인 사업에 확대에 나섰단다. 특히 오솔아파트, 동신아파트와 다원파크빌 주변은 군산의 술 전성시대를 열었던 곳. 다시 말해 군산의 위용이 전국적인 수준에 올랐을 때, 지금의 원도심은 수많은 업종(협력업체) 인사들이 오간 번화가였다. 금동의 88한신아파트 부지에 있었던 고려주조장은 백화에서 인수만 해놓고 활용은 거의 안됐고 그 주위에는 사이다를 만든 공장(삼양사이다)이 있었다 한다. 또 신흥주조장(양조장)이 있었던 금동의 동신아파트 부지를 기반으로 기타 재제주(위스키, 인삼주, 보드카, 삼바) 등을 생산해왔지만 장소가 협소, 이전이 불가피했다. 70년대 경제 개발 시기, 경제인들은 접대할 곳이 많아졌고, 접대받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당시 외산 조니워커가 접대용으로 크게 활용됐지만 가격 등으로 부담스러웠으므로 국산 양주의 개발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당시 여종업원의 팁이 3000원이었고 국산 양주는 4000원이었단다. 이 당시 가격 결정을 놓고 내부관계자들의 고민은 적지 않았다. 너무 싸도 제품의 질과 위상에 문제가 될 것 같아 첫 국산양주 가격을 결정을 했다는 것. 나중에는 1만원까지 올랐다. 백화는 이 때문에 인근에 있는 다원파크빌(과거 북중(오늘날의 중앙중)이 있었음)로 확대이전한 뒤 우리나라 최초의 위스키를 출시한데 대량생산체제를 갖췄다. 이런 수요에 맞춰 나온 것이 76년 '조지 드레이크'였다. 2년 뒤인 78년 베리나인 골드는 84년까지 국내 위스키시장을 싹쓸이 할 정도로 빅히트를 쳤다. 이 양주들은 모두 원핵 함량 100% 위스키가 아니라 수입한 위스키 원액에 주정을 섰은 기타 재제주였다. 당시 베리나인의 맛이나 패키지가 발렌타인을 모방했다하므로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발렌타인을 선호하게 된 이유는 무의식적 친근함도 작용했을 것이란 얘기도 있다. 현대 오솔아파트가 위치한 곳에는 백화의 청주공장이 있어 오늘날 롯데주류공장(과거 두산공장)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이 때 백화는 대명동 33빌딩 부지에 소주와 주정을 생산하는 공장을 가동했으나 소득수준에 따라 고급주 중심으로 시장이 변화될 것으로 보고 소주 사업권을 반납한데 이어 강 회장의 아들 사업실패 등으로 급격히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된 것이다. 시기별로 보면 1973년 미원에 백화의 지분 3분의 1을 매각했고 두산에 85년 12월 완전매각하면서 정은학원만 남기고 사업에서 손을 놓게 됐다. 월명동소재 낙원이란 식당은 강 회장의 아들이 살았지만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고 나대곤 회장에게 넘겨졌고 인근 고판남 회장이 오랫동안 살았던 일본식 고택이 있었다. 강 회장은 이곳에서 인접한 곳에 살았지만 1977년 호원대에 사재출연을 했고 이곳에 그의 유지대로 2004년 호원대 유치원이 설립됐다. 다소 떨어졌지만 엄대우 전 국립공원이사장이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고 해방 전후 판검사 숙소로 이용됐다가 엄 전 이사장측에서 구입,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이곳 주변은 군산의 경제적인 거두들이 집중적으로 살아 군산의 부촌이자 경제인들의 집중 거주지이기도 했다. 군산국악원과 명창들 월명동의 군산국악원은 유곽시장이 있던 명산동에 있었고 창(唱), 가무 등을 배우는 실기반과 취미로 배우러 다니는 동호인반으로 운영됐다. 당시 사람들은 동호인을 '한량'이라 불렀다. 동호인은 기관장이나 회사 고급간부, 사업체 사장 등 돈많고 나이 많은 지역 유지급들로 이뤄졌다. 이전에는 권번 출신 기생 등도 초기 국악발전과 안착에 도움이 됐던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군산국악원(군산국악연구회)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일제 민족말살정책으로 군산에서 국악의 맥도 위기에 처했지만 해방 후 지역들이 나서 오늘의 기반을 닦은 것은 동호인들이었다. 이들은 1948년 기금을 모아 군산국악연구회를 설립한 뒤 기악부, 창악부, 무용부 등을 두고 국악의 맥을 확고히 했다. 특히 1967년 박환준 국악연구회장의 사재 쾌척과 군산시청의 보조를 받아 창성동에 조그만 건물을 장만했다. 여기에는 강의실과 실습실 등을 갖춰 군산국악원이라는 현판까지 내걸었다. 이를 계기로 국악인들간 친목은 물론 판소리와 장구춤 등 다양한 레퍼토리의 국악제를 해마다 개최해 명실상부한 국악원으로 입지를 굳히면서 국보급 국악인들이 다수 탄생했다. (사)한국국악협회이사장 등을 거친 이영희(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예능보유자) 명인을 비롯한 김수연(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고 성운선(전북지방문화재 2호) 명창, 임화영 명창(익산국악원장), 김금희 명창, 김경숙 명창 등이 이곳에서 예인의 꿈을 키웠던 인사들이다. 또 당시 전국 최연소 원장으로 군산국악원장을 맡았던 김갑식 (사)금강문화예술원장과 남춘배 군산국악원장 등도 지역 국악발전에 힘쓴 인사들이다. 직접적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군산에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지역국악발전에 앞장선 최란수(전북무형문화재 2-5호: 지난해 6월 작고)선생 등도 눈길을 끈다. 특히 고인이 된 최란수 선생은 한국 판소리보존회 군산지부장을 맡으면서 한평생 제자 양성하는 일에 앞장서왔을 뿐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군산을 지킨 참예술인이었다. 이후 군산국악원은 우여곡절 끝에 창성동 시대를 마감해야 했다. 시설이 낙후된데다 협소해 지금의 월명동 건물로 이전, 지역 국악발전에 동력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창악실, 기악실, 무용실, 농악실 등을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