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장길(시네마 우일․ 국도극장․ 운정식당․ 교복판매업소단지 등)(상) 극장가, 지금 폐업 중 밤엔 칠흑만 '가득' 개복동 성매매업소 화재참사 현장과 옛 경찰서 부지, 개복파출소 등을 뒤로하고 중앙로쪽에서만 들어올 수 있는 일방통행로인 극장길이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맞이한다. 이 거리는 약 200m 구간으로 군산의 근․현대문화를 선도하던 곳이자 한때 전북 최초의 극장이 위치할 정도로 엄청난 문화사 위상은 물론 사회적 얘깃거리가 있었던 향수어린 공간이다. 다시 말해 당시 상권 1번지이자 최고의 번화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곳을 최근에는 '예술인의 거리'라 부르고 시가 2008년 2월부터 휴식 및 문화 공간 조성 등에 노력했지만 도로에 채색작업과 조그만 주차장 조성 등을 했을 뿐 수년째 별다른 진전은 없는 상태다. 해방이후 전북문학과 문화(영화)를 주도하던 지역치고는 매우 한가한 곳이다. 이곳에서 눈길을 붙드는 것이 극장가와 지금은 사라졌지만 지역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비둘기다방이다. 이곳에 나온 무수한 옛날 얘기들을 조금씩 나눠 정리하기 위해 지역 극장 소사(召史)와 비둘기다방과 관련된 문학기행을 다뤄본다. 이 골목길의 시대적 연관어의 출발은 역시 '극장 얘기'일 것이다. 극장이 있었기에 문학동인들의 모임장소인 다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군산은 일제가 개항과 함께 호남 지방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인천(제물포)과 부산에 이어 집중적인 공략했던 항구여서 일본 문화 및 경제의 침탈이 다른 지역에 비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일본인들이 본격 상륙하면서 일본의 유랑극단과 이동식 영사기만 지닌 이동극장이 함께 들어와 1910년 초부터 공연과 상연을 한 것으로 보아 극장은 이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펴낸 ‘호남선’에선 '군산에는 군산좌와 명치좌 두 곳의 극장이 있다'고 적고 있다. 전북 최초의 극장은 현 '시네마 우일(일제강점기 때 군산좌로 불리움'이다. 군산좌는 개장 초에는 일본 전통극의 가부키 중심의 공연을 하였으나 변사가 진행하는 활동사진인 신파극과 연극(창극 등)도 교대로 상영하는 다기능 공연장이었다. 본래 군산좌는 죽성동 수협 앞 골목(동광한의원 뒤) 안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1925년 화재로 오늘날의 시네마 우일이 자리하고 있는 개복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1926년 2월 극장이 신축되면서 군산극장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해방 후에도 건물형태와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1996년 대규모 내부공사를 마치고 '시네마우일'로 대변신을 했다. 이곳은 미군정하의 적산관리국에서 불하한 뒤 김봉희, 김원전, 육복술, 백정흠씨 등의 주인을 거쳐 박주일씨까지 넘어왔다. 하지만 나운동 등의 신시가지 확대와 현대식 경쟁 매체(비디오와 현대식 극장) 등이 등장, 폐업한 뒤 아쉽게도 문을 닫고 있는 상황이다. 군산의 두 번째 극장이자 전북 최초의 전문영화상영관인 희소관은 1934년 현재의 국도극장 자리에 설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희소관은 영화전문상영관이었기 때문에 군산의 각급 학교들의 단체 관람이 집중됐다. 희소관은 해방 후 남도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국도극장으로 개명돼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시네마우일과 마찬가지로 쇠락을 거듭하다 문을 닫은 것이다. 상권이 확장되면서 한일은행이 1921년 11월7일 강경지점 군산파출소로 개점, 다음해 9월1일 군산지점으로 승격했다. 한일은행과 호서은행의 합병으로 이곳은1931년 1월21일 (주)동일은행 군산지점이 됐다. 이후 1943년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의 합병으로 (주)조흥은행 군산지점으로 되었다가 신한은행 군산지점이 되었지만 지금은 수송동으로 이전, 소상공인 교육장소와 자동화코너만 남아 있다. 이들 상권 때문에 이곳에는 해방정국에서 사회주의자였던 강철씨가 '해방서점'을 열었고, 일제 강점기부터 고문봉 청구목재 회장의 부인이 회춘당이란 약방을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어 해방 후 청구목재의 설립 기반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아들도 고병조 회장도 뒤를 이어 사업에 투신, 군산 경제인으로 한때 명성을 쌓았단다. 이 극장가 주변은 국내 유명 정치인들과 인연이 많아 새삼 화제가 되곤 한다. 1960~70년대까지 있었던 선양동소재 근화여관은 김종필(88) 전 자민련 총재이자 국무총리의 외가로 잘 알려져 있다. 외가는 전주 이씨 가문으로 어머니 이정훈 여사(작고)의 친정집이 근화여관이었다. 상권과 뒷골목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어서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힘의 원리라 할 수 있는 건달의 세상이 열렸단다. 군산 최초의 한국인 다방인 고향다방과 유명한 카페였던 파라다이스 등이 이들의 주무대였다. 유명한 주먹들의 활동무대였을 뿐 아니라 먹자골목도 형성됐다. 청춘옥, 삼승식당과 영화식당, 한양옥, 신생그릴 등 유명한 식당가로 즐비했단다. 지금도 운정식당은 녹두삼계탕으로 유명, 향수와 맛을 그리워하는 인사들이 자주 찾고 있는 음식점이다. 과거와 다른 것은 상권 쇠락으로 주로 단골들만 찾은 맛집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백범 김구 선생과 군산 인연 군산과 백범 김구선생과 많은 인연이 있었지만 정리된 사료는 많지 않다. 더 사라지기 전에 자료와 지역 원로들의 기억과 자료 등을 찾아 정리하는 장을 만들었다. 백범과 군산의 인연은 기록상으로 세 차례로 나와 있는 것이 정설이지만 기록에 따라서는 한 차례가 추가되어 있어 모두 네 차례일 수 있다는 설도 있다. 첫 인연은 백범이 중국에서 비행기 편으로 군산공항을 통해 입국한 1945년12월2일이다. 백범이 미군정의 반대로 개인자격으로 해공 신익희선생 등과 함께 제2진으로 입국한 것이다. 두 번째는 1948년 10월10일 군산여상을 방문, 학교 현판을 직접 썼다는 시점이다. 백범은 동산학원 설립자인 고 매촌 정만채 선생과의 인연으로 학교를 방문한 것이다. 세 번째는 1949년 4월20일 한국독립당(한독당) 군산지부 건국실천원 단기양성 강좌회 개강식과 군산부두어업조합방문이다. 그해 4월 방문과 비슷한 내용으로 5월 중순 당원단기강습회 개강식에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어 명확치는 않지만 이 기록이 정확하다면 네 차례 방문으로 기록될 수 있다. 아마 이 시기인 1949년 4월과 5월 군산 방문 때 백범은 한독당 지역간부인 고 김영배씨가 운영하는 음식점에 들렀던 일이 일화로 남았다. 그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로 백범을 위해 진수성찬을 차려 대접하려 했단다. 하지만 평생 조국광복을 위해 싸워왔던 투사답게 백범은 "해방 조국의 동포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이것이 웬 것이냐"고 역정을 내면서 "(중국 망명시절을 떠올리며) 콩나물만 남기고 다 물리라"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도 1955년 4월21일 군산을 방문, 군산여상에 들러 정만채 선생과 만났다는 것은 정설이다. 정만채 선생의 풍모는 물론 인간관계 때문에 대통령 자격으로 직접 방문한 것이다. 아마 이때 월명동소재 항도 호텔에서 숙박한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