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길 (극장가~ 안동집)과 창성 2,3길'합류하는 곳 작품 속 정 주사 출․ 퇴근길 '콩나물 고개' 선양동 해돋이 공원 탄생… 낙후 넘은 희망봉 아리랑길 중 극장가를 넘으면 올망졸망한 가게와 음식점, 여관들이 있다. 개복교회와 영광여고가 위치하는 정상부근은 옛날에는 야산이었지만 최근에는 고지대 노후 불량 밀집지역에 주거환경을 개선, 빈터와 일부 집들만 남아있다. 고지대의 판자촌을 헐어낸 산정상은 2002년3월 공사를 시작, 2004년 11월 완공한 선양동 해돋이공원이다. 선양고가교를 넘으면 이 공원의 중심에 팔각정이 있다. 이곳은 사방이 확 트여 군산 전역을 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60~80년대까지도 선양동 일대에는 오밀조밀하게 집들이 붙어 있어 작은 민속촌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이곳에서 보면 가깝게는 월명산자락과 월명동, 영화동 등이 사정권에 들어오고 나운동과 수송동 등이 이웃에 있다. 또 멀리에는 금강 넘어 서천군 장항읍, 금강변이 손에 잡힐 듯하고, 옛 교도소가 있던 금광동 삼성아파트 주변도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아리랑길에서 옛 선양동사무소(시소와 그네)가 있던 길로 오르면 백릉의 소설 무대이자 체취가 짙게 남아있는 곳이 '콩나물 고개'다. 그 주변에 탁류 속 한참봉집 쌀가게와 정주사집 등이 있었다. 현재의 국도극장에서 선양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콩나물고개라 부르며 지금의 창성동 고지대가 재개발로 인해 아파트촌으로 변해있다. 채만식 소설 '탁류'속 정주사가 출․퇴근길로 넘나들던 곳이 바로 이곳. 재산을 다 팔아먹고 창성동 고개 위(둔배미)의 초가집으로 이사한 정주사가 오르내리던 길이다. 일제 때 산줄기를 끊어 삼학동~ 명산동을 잇는 길을 냈다. 이른 바 '산 끊어진 데'라는 곳이다. 끊어진 부분에 고가다리를 놓아 다시 이었다. 다리 위에 탁류의 무대임을 알리는 빗돌이 있다. 콩나물고개 주변은 일제강점기 전후에도 지금의 창성동, 개복동, 송창동의 높은 지대에는 인가가 없었고 울창한 야산인데다 꽤 높은 산이었단다. 약 100년 전, 지금의 창성동 고개에 '주(酒)'라고 쓴 깃발을 단 주막(酒幕: 옛 동네 선술집)이 있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시내 중심가는 일본인들이 차지한 반면 피지배층이었던 우리 선조들은 개복동, 송창동, 선양동 등지의 산기슭에 있는 토담에 짚을 이어 만든 초가집 모양이 콩나물시루같이 모여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고 해 지어진 이름이다. 또 품삯만으로는 살기가 어려워 콩으로 만든 콩나물이나 두부를 빚고 길러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는데서 연유했다고 설도 있다. 정주사는 작품 속에서 콩나물 고개에 굴이 뚫린다는 이야기를 듣자 콩나물 고개에 있던 자신의 마지막 재산인 집이 무너질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기억을 새롭게 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탁류 문학비인 정주사집이란 표지석과 책모양의 안내판이 있을 뿐이다. 아리랑길을 쭉 따라 가노라면 개복길, 창성2길과 창성3길, 선양2길 등이 지류처럼 나뉘어 있고 오른쪽은 창성주공아파트가 덩그렇게 서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창성주공아파트는 노후주택들로 골목을 메웠지만 2006년3월 군산시와 LH공사의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깔끔이 정리되어 있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지금 약 600세대의 아파트촌이 들어서 과거의 을씨년스런 분위기는 거의 사라졌고 주변은 깔끔히 정리되어 있다. 옛 선양동사무소 옆의 가파른 길을 넘으면 비교적 대로인 월명로와 마주한다. 선양동은 2008년 1월 군산시의 소규모 동 통폐합으로 월명동으로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직도 여러 길들이 뻗어있지만 여전히 한겨레문화센터, 만두가게, 선술집, 군산복음교회와 안동집과 같은 음식점 등이 존재한다. 긴 역사는 아니지만 안동집은 맛있는 김치찌개와 청국장 등으로 밤이면 술꾼들의 놀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조금만 가면 선양동공영주차장이 있는데 군산대 인근에 있었던 미룡양조장의 사장이자 일제강점기하 군산부 2대 회의원(1935년께)이었던 군산의 갑부인 김영희씨의 본가가 있었던 자리다. 극장가 주변은 항상 사람들 얘기로 넘쳤다. 1960~70년대 국민스타였던 서영춘과 배삼룡 등이 이끈 악극단은 군산극장 등에서 출연하기 전에 인근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공연했고 인근 여관에서 숙박했단다. 또 화가 및 지망생들은 194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 극장가에서 영화 간판을 그리며 연명했고,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하반영 선생(화가)도 처음에는 이곳에서 일을 했단다. 이들 연예인들이 공연할 때면 주변은 아수라장을 연출할 만큼 인파가 몰렸을 정도로 대단했다. 하반영 선생은 유인촌 전 문화관광부장관과 큰 인연 등으로 근대역사문화벨트를 조성하는데 일조했다는 일화도 있다. 여기에서 빠트리지 못할 곳이 권번(券番) 얘기일 것이다. 권번은 조선의 전통적 기생교육을 받은 여인들의 기예를 맛 볼 수 있는 곳으로 일제 때 기생들이 기적을 둔 조합으로써 기생들의 요리집 출입을 관리해주고 수고료를 받아주는 중간 역할을 했다. 당시의 기생은 국가에 허가를 받는 허가제 직업으로 권번을 통해 국가에 세금을 납부했다. 군산극장(현 시네마우일)에 인접한 뒷길에 권번이 있었는데 이곳이 소화권번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문을 열었던 소화권번은 권번에 입교하면 4년 과정으로 예절, 시조, 가곡, 판소리, 춤 등을 가르쳤다. 또 다른 권번은 영동 국민은행 뒤 반찬시장 인근에 있었던 군산권번이다. 당시 한 개의 권번에 기생 숫자가 20~30명씩 있어 군산에는 40~50명의 기생들이 활동했단다. 이곳의 기생들은 일제 말기 대표 요리집이었던 명월관(구 유성예식장)과 대명동에 자리한 근화각에서 한 시간에 2원 내지 3원의 돈을 받고 모임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중 명월관은 기생만 50명이 넘었고 그 중에는 권번 출신도 상당수 있었단다. 해방 후 이곳 출신의 기생들은 예술인의 길을 걷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군산 권번출신 최금앵이 명산동에 군산국악원을 설립, 권번의 전통기예를 이어갔다. 이중 소화권번에 입적한 뒤 최창윤, 김백용 등 당대 명인들에게 승무, 검무, 화무 등을 익힌 장금도 선생 등도 이곳 출신 예인들이다. '선양동 은군자 마을(?)…'500고지'는 은군자(隱君子)마을은 일반적인 조선인들이 이용하는 막걸리를 파는 선술집형태의 주점이다. 그 위치는 선양동 산 끊어진 곳의 동쪽 편과 개복동 지역으로 그곳에는 여러 채의 주점들이 자리하고 있었단다. 은군자란 조선시대 국가에서 불법화하고 있는 성의 매매를 은밀히 행하고 있는 여성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당시 생활수단을 잃은 여성들이 성을 최후의 생활수단으로 삼았던 것에서 유래했다.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를 보면 은근하게 몸을 파는 은군자가 성매매를 하는 여성의 한 분류로 구분되어 있다. 80년대까지 선양도 중턱에는 꽃집 혹은 오백고지라는 이름으로 전통적 은군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곳에 가서 술을 마시려면 오백원이 필요해서 오백고지라는 말이 있었다는 말과 5백 계단(계단이 아주 많았다는 의미)에 가까운 계단이 있어 이렇게 불리웠다는 설이 존재한다. 개복동에서 선양동으로 가는 길에 지나가게 되는 콩나물 고개는 둔배미, 둔뱀이라고도 불리는 나지막한 야산의 판자촌이다. 해방이후 신흥동 유곽의 성매매 여성들이 이주해 성매매를 하던 곳으로 1970년대 초반 해도 수백 명의 성매매 여성들이 거주했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500원만 주면 긴 밤을 보낼 수 있는 언덕이라는 뜻에서 일반에'개복동 500고지'라고 불리웠다. 이런 형태는 익산시의 경우 옛 이리농림고(현재의 전북대 익산캠퍼스) 주변 등에 여전히 존재하는 술집형태이다. 이 내용은 군산역사이야기와 지역민 등으로부터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