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명로와 금광길이 만나는 곳(명산철물, 끼헤어, 명산시장)(상) 화교소학교․ 구암병원 등이 있었던 향토사적인 의미를 지닌 거리 명산사거리에서 월명로를 따라 몇 걸음만 선양고가교 방향으로 내딛으면 명산시장이 있다. 끼 헤어와 명산철물 등을 거쳐 몇 발짝만 내려가면 금광로라는 푯말이 있는 곳이 명산시장. 이곳과 붙어있었던 옛 신흥동 유곽은 일제강점기 때 호남 최고의 유곽으로 일본인들을 상대로 하는 고급 술집이었다. 1900년대 초 이곳에 유곽이 들어섰는데 당시로선 상당한 이권사업이었단다. 당시 후보지로는 신흥동 산수정(현 명산시장)과 팔마산 동쪽 평지(경장리), 그리고 경포리 부근 해변가(고속터미널 인근) 등 3곳이 경합을 벌이다가 최종 신흥동 산수정이 선정된 것이다. 이 땅은 군산의 금융왕이라고 불리던 일본인 사토오이 것이었다. 그는 본래 논과 작은 저수지가 있던 이 지역의 많은 땅을 싼 가격에 매입, 그 중 유곽이 들어설 부지 주변 약 1만 6000㎡를 일본민회에 무상 기증하는 조건으로 유치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곽후보지 선정을 위해 일본민단 내에 선정위원회까지 구성됐을 뿐 아니라 군산이사청의 고위관계자가 직접 관여했을 정도다 이후 현 신창동 인근에 소규모 유곽이 또 들어섰다. 1930년대에는 일본인 유곽이 8곳이었고 조선인 유곽은 3곳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유곽은 칠복(명산동 화교소학교 자리). 일제시대 번성했던 이들 유곽들은 미군진주 후 공창제도 폐지(1948년 2월) 방침에 따라 사라졌고, 한국전쟁기간에는 피난민들의 임시수용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칠복은 1925년 만들어진 목조 2층 건물이었지만 해방 후 군산화교들이 매입, 지금까지 소학교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2002년 화재로 이 건물은 소실됐고 그 후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오늘(화교소학교)에 이르고 있다. 유곽이 번성하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돼 유곽시장으로 불리운 것이 오늘의 명산시장이다. 지금 이곳의 상가번영회장은 복태만씨. 해방 후 채소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유곽을 불하받고 유곽고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장터를 만들어 운영해오다 지명을 따 명산시장으로 개칭한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노점 형태로 운영되는 바람에 시와 경찰의 단속에 '쫒고 쫓기는'상황이 연출돼 흩어졌다 모이는 새와 같다하여 '새시장'이라는 별칭도 있다. 본격적으로 시장 형태를 갖춘 것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정식 시장으로 개설된 명산시장(인정시정)은 점포수만 약 50개소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했지만 대형마트의 공세로 크게 위축된 상태다. 이곳에는 명산청과, 개복건강원, 강경반찬 등의 점포들이 영업 중이지만 예전만 못하다. 명산시장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곳이 군산의 첫 서양병원이 군산야소병원이자 구암병원이다. 한때 그 위상은 대단했었지만 1980년대 초반 문을 닫아 흔적만 남아 있다. 홍복근 원장과 군산 최초의 서양병원 '구암병원'…야소병원의 후신 군산에서 서양식 의료서비스가 첫 선을 보인 때가 1896년 4월(또는 2월 닥터 드류가 첫 진료한 시점을 기준). 이는 군산개항이 있었던 1899년 5월보다 3년이 앞선 시점이다. 의료선교사 A. D 드류(한국명 유대모:)와W. M 젼킨(한국명 전위렴:1865~1908))이 군산진영이 있었던 수덕산 기슭의 초가를 매입, 포교소를 설립하고 의료 선교활동을 시작한 때다. 버지니아 의학부를 졸업한 드류는 1893년 결혼, 부인과 함께 한국선교에 나서 1896년 2월 군산에 들어왔다 젼킨과 합류, 본격적인 의료 선교활동을 벌인다. 이때를 서양식 의료서비스의 기원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이들 선교사들은 포교소 한쪽에 약방을 꾸며놓고 오전에는 전도를, 오후에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해 가을에 서울에 머물던 데이비스라는 여 선교사가 합류했다. 그녀는 해리슨 선교사와 1898년 결혼, 전주에서 의료 및 선교활동을 벌이다 1903년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사망했다. 1899년 개항과 함께 수덕산 일대가 일본의 조계지역으로 지정되자 큰 배가 정박하기 편리한 군산시 구암동(당시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구암산) 산기슭에 건물을 짓고 '예수'�의 한자식 번역어인 '야소(耶蘇)'를 붙여 군산야소병원을 개원했다. 당시 구암리 지명이 궁멀이어서 '궁멀병원'으로도 불렸던 이 병원의 드류와 젼킨 선교사는 전도선을 타고 연안 도서지방을 순회하면서 진료와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 후 미국 버지니아 의대를 졸업하고 뉴욕 소사이어티 라잉(Society Lying)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 토마스 다니엘이 1904년 결혼과 함께 군산에 도착, 궁멀병원을 재 개원한다. 이에 앞서 초기 선교사들은 건강 등의 문제로 본국으로 간다. 다니엘은 열악한 시설과 환경에도 심혈을 기울여 의료 및 선교활동을 벌이다 1910년 전주예수병원으로 옮겨간다. 1902년 가을 A.J.A 알렉산더는 병원장으로 부임했으나 얼마 안돼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던 중 군산으로 피신, 선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오긍선과 함께 도미(渡美)했다. 1906년 미국으로 귀국한 알렉산더가 기부금을 보내와 새로 병원시설을 갖췄는데 18개 병상 2개동규모의 애킨스 병원으로 개칭, 운영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진료하던 대표인사들은 다니엘(1904~1906년: 군산진료기간), 오긍선(1907~1910년: 군산진료기간), 패터슨(1910~1924년: 군산진료기간) 등이 진료하면서 지역민들로부터 신망 받은 병원으로 거듭난다. 특히 오긍선은 미국에서 1907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군산과 광주, 목포 등지의 야소병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세브란스 의전교수와 교장 등으로 일하면서 고아 구제 사업에 힘쓰다 1963년 별세했다. 새로 병원이 만들어진 시기가 1906년 패터슨(한국 명 손배돈)이 병원장으로 부임한 때다. 이 때 한국인 의사로는 세브란스의전 출신 강필구(1931년)와 홍복근(1937년) 등이 근무했다. 1924년 패터슨이 귀국하면서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홍복근 원장(1937~1941년: 군산야소병원 근무기간) 등이 뒤를 이었다. 이후 세브란스를 졸업한 홍복근 원장의 아버지 홍원경(1945년 작고)도 이 병원의 의사였는데 1919년 3.5만세에 가담했던 민족주의자였다. 이 병원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이곳에서 일하던 의료선교사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면서 문을 닫는다. 하지만 한국인 의사였던 홍복근 원장은 서래장터 물문다리 옆(중동 서래산 아래) 함석집에 구암병원 간판을 걸고 명맥을 이었다. 이후 구암병원은 명산동 명산시장 근처(지금의 공영주차장)로 이전, 1982년까지 진료하다 폐원했다. 시인 고은 선생도 홍복근 원장과 교분을 쌓았을 뿐 아니라 의료 혜택을 받았단다. 아쉽게도 서양의료를 군산에 첫선을 보였던 구암병원은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등 지역의료 발전에 기여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