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명로와 금광길이 만나는 곳(명산시장과 화교소학교)(중) 군산 이주 1899년 개항 후 본격…화교 인구 한때 1000여명 넘어서기도 화교소학교 1942년 개교 후 70여년 역사 자랑 명산시장을 생각하면 유곽과 함께 화교소학교 등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유곽과 화교, 화교소학교 등이 있는 금광길은 이웃에 살았던 화교들의 삶터이자 우리 사회의 일원들의 얘깃거리이다. 이런 과거 때문에 군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화교와 관련된 일화나 소재들이 수두룩하다. '우리의 이웃' 화교, 그들은 누구이고 군산과 인연은 언제부터인가.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인 여건, 즉 군산의 화교들은 서해를 마주하고 있는 '산동성 출신'이 대부분이다. '화교(華僑)'란 단어는 중화의 '화'와 교거(객지 생활)의 '교'가 합쳐진 약칭으로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이라는 의미다. 중국인의 첫 국내 이주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군과 함께 들어오면서 비롯된다. 이들이 언제부터 군산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군산에 화교가 공식적인 거주를 시작한 것은 1899년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시작된다. 당시 군산과 관련된 화교의 첫 기록은 1900년 황성신문 잡보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개항 1년 후 군산이 각국 조계지역으로 개항장이 되자 인천과 원산에 거주하던 청국인들이 치외법권지역인 군산조계지에 이주했고 이들의 안전과 이해관계를 돕기 위해 청국 영사관이 설치된 것이다. 1901년 11월 인천항의 청국조계지 내에 개업한 해운회사의 기선이 인천과 군산을 정기 운항했다는 언론 기록이 있다. 실제로 1894년 군산에 처음 도착한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인천에서 군산까지 여객선을 이용해 들어왔다는 기록으로 미뤄 상당히 활성화된 항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볼 때 당시 군산이 청국인들에게 중요한 활동 거점 지역의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초창기 군산에 화교가 거주했음을 확인해주는 자료로는 화교 최고 무역회사였던 동순태상회의 상해 본점과 조선 각 지점 간 연락장부인 '동태래신'을 들을 수 있다. 동태래신에는 1905~1906년 까지 원산과 인천, 군산의 동순태상회지점의 무역사항이 정리되어 있다. 이 상회가 군산의 조계지역 중 5개 지역의 토지를 경락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군산에 이주하기 시작한 화교들의 주요거주지역과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1911년 제작한 군산 각국 조계지역 지주현황지도다. 군산에 거주한 화교는 1910년 일본인(3000명 정도) 다음으로 많은 499명이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대부분 산동성의 내항, 용성, 영도지역 등 주로 바닷가 주변 출신으로 주된 직업은 도시나 읍내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상인(포목, 요식업, 잡화)과 도시 주변에서 야채 등을 재배하며 판매하는 농민 및 노동자들이다. 주요거주지인 영화동(당시 전주통) 인근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규모 도매상인 금성동과 우풍덕이 있었다. 요리집은 동해루, 평화원, 대화루, 쌍설루 등이 전북은행 군산지점 인근과 시내 중심지에 있었다. 또 화교농민들은 사정동과 개정동, 회현면, 삼학동 대우아파트 및 중앙초 뒤쪽(당시 밭) 등에서 밭농사를 주로 했다. 특히 이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집은 약 110년 동안 우리 전통음식처럼 자리 잡아 친숙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해방은 우리민족에게나 화교들에게도 큰 변화를 줬다. 농업을 하던 화교들은 주요 소비계층인 일본인들이 쫓겨 가자 대부분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해방 당시 약 1200명이던 화교들이 절반가량 귀국했고 1970년대 이후 상당수가 해외로 이주, 최근에는 40여명만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화교와 오랫동안 같이한 곳이 옛 시청 주변에 있는 군산중화기독교회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화교 선교자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처음 한국의 중국인을 위해 헌신을 결심한 사람은 미국 선교사 부인 C.S 데밍. 중국 선교사 부부의 자녀로 태어난 데밍 여사는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미국에 정착했다가 한국인 도이명 박사를 만나 결혼했다. 그녀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노력한 끝에 한성교회를 1912년 5월 개척했다. 이후 화교교회가 부흥했지만 한국전쟁을 고비로 시련과 위기를 맞았다. 거의 교회조직을 무너지는 결과를 빚었다. 50년대 후반에 군산중화기독교회를 비롯해 인천 등지의 화교교회가 재건됐다.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화교소학교 군산화교소학교는 1941년 10월10일 중국어문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장미동 만춘향(과거 전주통)에 위치한 중화상회 사무실에서 문을 열었다. 중화상회는 1927년 설립한 화교협회의 옛 이름. 당시 회장은 무역업을 하는 록암정이었다. 개교 당시 한강이남에서는 최초로 만들어진 이 학교는 록암정(교장), 우강의씨의 노력으로 건립됐다. 학생은 군산시내 학생 50여명과 기숙사에 거주하는 유학생 10명 등 모두 60여명이 수학하는 학교였다. 자녀들이 제때 교육을 받지 못하면 문맹자가 될 것이라는 우려 속에 교육의 필요성을 절하게 느낀 록 회장은 소학교 설립계획을 세우고 추진위원회를 만드는 한편 일제 교육관청 직원들을 설득, 중국어문강습소 허가를 받아냈다. 이듬해인 1942년 일제로부터 군산화교소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는다. 서울과 인천 다음으로 문을 연 화교소학교는 심상과(초등학교) 6년 과정으로 매일 6시간씩 수업을 했고 수업과목은 중국의 북경어를 중심으로 산술, 자연, 주산, 음악, 체육 등이었다. 이 학교는 1947년 가을 중앙로 2가 중앙초등학교 인근 과거 일본인 병원(옛 한일상호신용금고 뒤편)으로 이전했지만 1949년 2월 화재로 전소한다. 이후 화교소학교는 1949년 11월11일 지금의 학교자리인 신흥동(현재 명산동) 유곽 칠복(대지 576평 2층 목조건물)으로 이전했다. 학생조달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980년 중앙각 주인이었던 형인진씨의 둘째 아들 형광의씨(제11회 졸업생)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는다. 당시 35세였던 형 교장은 중앙대와 원광대 약대를 졸업한 뒤 1970년부터 영동에 중국 장수당약국을 개업, 운영해오고 있다. 1998년 중화민국 주한대표부에서 예산을 받아 유곽건물 맞은편에 현대식 교사를 신축했다. 2001년 신축교사를 2층으로 증축하고 외국인학교로 인가받는 등 학교발전에 헌신했다. 또 군산시와 중국 교류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등 한중 교류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2002년 4월7일 교실로 사용해오던 유곽건물과 자료 등이 화재로 전소되는 아픔을 또 한 번 겪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형 교장의 딸이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