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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 유곽 등 군산의 유흥업소 \'과거와 현재\'

인류의 탄생이후 가장 먼저 생긴 직업 중 하나가 성(性)과 관련됐다 한다. 군산도 근대사를 얘기를 하면서 일제의 많은 어두운 단면을 담고 있었다.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14-05-02 11:45:11 2014.05.02 11:45:11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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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가라오케·노래방·룸살롱 등 현대적인 성인용 유흥업소 등장 <최후의 요정집 중 하나였던 은마가 문을 닫고 한정식 집으로 바뀌었다>   인류의 탄생이후 가장 먼저 생긴 직업 중 하나가 성(性)과 관련됐다 한다. 군산도 근대사를 얘기를 하면서 일제의 많은 어두운 단면을 담고 있었다.   이중 어두운 면을 얘기할 때 대표적인 분야가 성을 사고파는 일이 아닐까.   이른바 유흥산업(또는 문화)의 출현과 번성, 쇠락 등의 변화과정이 얘기의 중심에 있다.   조선시대는 기생문화로 대표적이었지만 개항과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군산에도 큰 변화가 온다. 조선시대는 유교문화가 사회전반에 강하게 깔려 있었기 때문에 술과 기예(技藝)를 중심으로 한 기생문화 중심이었기 때문에 성을 사고파는 문제는 사회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을 매매하는 풍토가 우리사회로 급격히 밀려들어오면서 매매춘이 사회의 현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사람 따라 골목길 따라'시리즈를 통해 권번이 있었던 극장가 주변과 그 주변의 감독, 명산동 유곽 등을 다뤘다. 하지만 이들의 근원을 다뤄 골목길에 있었던 유흥업 또는 유흥산업의 변화상을 점검했다.   이러한 성 매매 형태에 대한 변화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그 첫째가 일제 강점기였고 다음이 해방 후부터 1970․ 80년대까지, 1990년대 이후로 크게 구분된다.   100여 년 전 군산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은 요리집을 비롯한 기생집, 유곽, 그리고 은근자 마을을 다녔고 일본인들은 요정과 유곽을 주로 출입했단다. 특히 일본인들은 침략자로서 본성을 보이면서 대규모 공창제도를 유입시켰고 군산도 물밀듯 들어왔다.   ◇ 일제강점기 '군산의 권번과 요정'   최초의 유곽은 부산(1902년)에 등장했고 대규모의 공식적 유곽인 공창은 서울의 신정유곽(1904년)이 시초였다.   당시 일인들도 현대 유흥업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처럼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의 시작은 돈벌이 수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군산의 유곽사업은 1900년대 후반 들어 본격화됐고 그 시발점이 명산동(당시 신흥동) 유곽이었다.   이후 신창동 인근에 소규모 유곽이 생기면서 본격화돼 1930년대 일본인 유곽만 8곳에 이른다. 조선인 유곽도 금강루와 청남루 등 모두 3곳에 달했다. 당시 유명했던 유곽은 2002년 화재로 사라진 칠복(명산동 화교소학교)과 군산루, 송학루, 송야 등이다. 명산동 시장 주변에는 옛 유곽형태를 지닌 건물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군산의 유곽은 명산동 이외에도 영화동의 일본인 시장 주변에 고급 요정의 형태로 존재하였는데 해방 후 이곳은 미군병사들을 상대로 한 유흥업소로 변신, 미국인 거리가 만들어졌다가 나중에 미성동 아메리카 타운(일명 국제화마을)이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요리집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출입했던 유곽에 비해 돈 많은 한국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격이 다른 곳이었다.   조선인 사업가들이 주로 이용하던 이곳은 식사와 술, 그리고 권번에서 조선의 전통적 기생교육을 받은 예인(藝人)들의 기예를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들을 어릴 적부터 교육시키는 권번이 군산에 두 곳이 있었다. 한곳은 개복동 극장가와 인접한 군산권번이고, 다른 한곳은 영동 국민은행 군산지점 뒤 반찬시장 인근에 있었던 소화권번이다.   이들 권번은 일제 때 기생들이 기적을 둔 조합으로써 기생들의 요리집 출입을 관리해주고 수고료를 받아주는 역할을 했다. 당시의 기생은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은 일종의 허가제 직업으로서 권번을 통해 세금을 냈다.   권번에서 가무와 글을 익힌 기생들은 1930~1945년 대표적 요리집이었던 명월관(구 유성예식장)과 대명동에 위치한 근화각에서 한 시간에 2원 내지 3원의 돈을 받고 모임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단다.   ◇ 해방과 한국전쟁이후 군산의 요정 변화   해방 후 미 군정청의 공창제 폐지(1948년 2월)로 유곽은 완전히 사라졌고 군산의 요정은 연정(옛 명월관)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이후 1960년대 이르러 감독 가는 길 사이에 공집이 생겼고, 그 뒤 장미동 만춘향 건물 앞 연못 있는 기와집에 연희정이 문을 열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합판산업과 백화양조가 호황을 누리면서 군산경제가 크게 번성한다. 이 시기에 개복동 텍사스 골목과 감둑 등도 활성화 된다. 이 시기에 선양동의 송죽, 개복동의 은마라는 고급요정이 생기게 된다.   이와 함께 한국 전쟁기에는 중앙초와 일출운동장(현 중동 돌산 주변)에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남 너머에 있던 구시장 감독가와 군산극장 인근의 유흥업소들이 대거 이주, 군인들을 상대로 영업하면서 일대가 환락가를 이뤘다.   해방 후 일제강점기 때 최고의 번화가를 자랑하던 전주통은 미국인 거리로 발전하면서 도심 풍기를 해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1969년 당시 옥구군 미면인 아메리카 타운(지금의 미성동 소재 국제화마을)로 옮겨갔다. 1980년대 최고 번성기를 누리다가 1990년대 들어 시설 노후와 미군 감축 등으로 크게 위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군산 요정의 황금기-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군산의 요정들은 대호황을 누렸다. 당시 정치인은 물론 행정기관장, 기업체 고위간부 등이 상호간의 계약이나 청탁, 정치 등을 하는 과정에서 주로 요정에서 만나 조율하는 요정 정치가 하나의 문화였다. 이 때 연정, 송죽, 영화동의 초정, 개복동 미창병원 앞 은마 등의 요정이 시대를 풍미했다.     1975년 당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에 실린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그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자료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유흥업소 등 개점휴업이란 동아일보의 사회면 기사에는 공무원들이 서정쇄신 작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나타난 제목이다.   또 경향신문의 경우 군산세무서는 올 주세 목표액을 70억원으로 책정했지만 서정쇄신 등으로 유흥업소 등이 불황을 겪으면서 술이 안 팔려 주세징수에 차질을 빚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는 것이다, 이 당시 3월까지 매월 1만~1만5000섬씩 팔렸으나 4월 들어 5000섬만 팔렸다는 기사내용이다.   ◇1990년대 새로운 유흥업소 등장   1990년 초․중반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과 함께 공직자들에 대한 골프 금족령을 내리면서 요정문화가 철퇴를 맞았고 더 이상 존립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유흥업소가 룸살롱 등 새로운 형태로 변하면서 기존 요정문화가 크게 위축되는 상황을 맞았다. 수요층이 과거 중장년층 중심의 유흥문화가 세대별로 분화되면서 요정들도 시대의 변화 속에 사라졌다.   실제로 군산의 경우 마지막 요정이라는 할 수 있는 1993년 경장동으로 이전, 새로 지어 영업을 했으나 얼마 못가 문을 닫고 해연이란 한식당으로 변했다.   또 이로부터 얼마 안돼 군산 전설적인 요정이었던 송죽도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이후 한국관과 백악관 등의 나이트클럽과 동경․ 풍차․ 킹 클럽 등 대형 스탠드바와 가라오케가 호황을 누리며 60여년 만에 요정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또한 노래방과 룸살롱, 가요주점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과거형인 관가 등 행정타운 중심의 요정문화 대신 다수가 오갈 수 있는 나운동 유흥업소 체제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쉬파리 골목 화재(2000년)와 개복동 유흥업소 화재(2002년) 등의 연이은 참극으로 이들 업소 등에 대한 시각은 매우 부정적인 여론으로 변했다.   이곳 종사자에 대한 인권 문제 등 사회적인 관심이 커지면서 관련 업소 퇴출과 성매매 방지법이 제정돼 전통적인 유흥업소는 사실상 사라졌거나 더욱 은밀한 형태로 영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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