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백화점 경쟁 치열… 미나카이, 초지야, 동아백화점 등 상륙 1930년대에도 군산에 백화점이 있었다. 군산의 번화가였던 중앙로 1가(명치통)에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이 들어선 이후 초지야(丁子屋)백화점, 동아백화점 등이 진출해 영업을 했단다. 미나카이 백화점은 현 군산우체국 자리에 있었던 군산지역 최고의 백화점이었다. 미나카이 백화점이 서울에 문을 연 것은 1932년이었고 지방에도 분점을 설립하는데 군산에 그 분점이 생긴 때는 1930년대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미나카이 백화점 외에도 군산에는 당시 송방골목(영동상가) 안에 최근까지 영업을 했던 동아백화점과 초지야백화점 등 2곳이 진출했었다. 초지야 백화점은 옛 군산경찰서에서 송방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좌측에 있었고 일본인이 운영했다. 하지만 나중에 영동상가의 산증인 강유식 사장의 선친인 강흥술 사장이 초지야 백화점을 해방직전까지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동아백화점에 대한 내용은 많지 않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 일제강점기 백화점 경영 시작… 일본인 대규모 자본 진출 한말에 이르러 조선의 경제 진출 주도권을 잡아왔던 삼정(三井)재벌은 그 직영백화점인 삼월(三越)의 지점을 1906년 서울에 설립했다. 위치는 충무로1가 현재 사보이호텔 건너편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것이다. 이어 1927년에는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일제강점기 시절 백화점의 총수의 지위를 누렸단다. 소림양복점을 경영해오던 고바야시(小林門中)가 1921년 4월 현대식 백화점인 초지야를 설립했다. 기모노점을 경영하던 일본인 나카에는 1922년 충무로1가 미나카이백화점을 설립했고 1932년 현대식의 대형점포를 신축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미나카이백화점은 군산을 비롯한 부산, 대구, 평양, 목포 등에 지점을 설립했다. 말하자면 백화점경영을 전국적인 규모로 연쇄점을 운영하는 새로운 경영방식을 도입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인들의 수가 급증하면서 일본계 소매상 및 종합상사들이 서울을 발판으로 활동했고, 국내 상업을 잠식해갔다. 이 당시 일본인에 의한 백화점 중 미나카이와 초지야 백화점이 군산에 진출, 영업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영업망과 유통망을 매우 많이 잠식했다. ◇ 조선인에 의한 백화점의 맹아(萌芽) 한국인의 백화점 경영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종로상인들이 백화점 경영의 길을 개척했다. 1916년 종로상인 김윤배가 종로2가에 김윤 백화점을 설립했지만 백화점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는 했으나 도자기류와 철물류를 다루는 잡화점에 지나지 않았다. 자본금이 적어 경영규모를 현대식백화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백화점 경영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유재선의 계림상회와 이돈의의 고려양행 등도 백화점 경영방식의 모형을 갖췄다. 이처럼 종로2가 주변이 영세한 규모이기는 하지만 백화점 거리로 그 모습이 바뀌어가면서 종로상인의 경영방식이 점차로 근대화의 길을 개척하여 가는 경로를 보여줬다. 남대문로 1가도 현대식 백화점에 가까운 화양잡화점 등이 들어서면서 종로2가에 맞서는 백화점거리로 부상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평안도 용강에서 인쇄소를 하다가 서울로 상경한 박흥식은 종로2가에서 금은방 영업을 하던 화신상회를 인수, 1931년 확장해나갔다. 당시 문을 열었던 주식회사 화신상회는 비록 그 규모가 작고 상품구성에 취약했지만 한국인의 손에 의해 개설된 우리나라 백화점의 효시라는데 의의가 있다. 한때 화신의 인접지에 한국인 최남에 의해 1932년 1월 동아백화점이 설립됐으나 오래가진 못했다. 1930~40년대 군산의 영동상가의 사진에 동아백화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백화점 중 토착화에 성공한 분점 또는 지점이 아니었나 싶다. 화신상회는 1934년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는 비운을 맞이했으나 그 이듬해에 박길룡의 설계와 시미즈 구미의 시공에 의해 현대식 건물을 신축, 명칭도 '화신'으로 바꿨다. 지하 1층 지상6층의 근대 르네상스 양식을 취한 건물이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하에 싹을 틔운 국내 백화점은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이라는 급격한 혼란기를 겪으면서 쇠퇴했다가 1960년대에 근대화과정의 한 부분으로 흡수돼 재편성,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갑자옥과 '사상의 은사' 고 리영희 선생(한양대 교수) 갑자옥 모자점은 한때 목포와 군산 등 국내는 물론 멀리 만주까지 지점(체인점)을 냈을 정도로 대단한 모자점이었다 한다. 군산의 갑자옥은 구경찰서 부지 앞 오거리의 영동입구에 권사진관과 이웃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그 주변에 '하나야 인력거 방'이 있었다. 군산에서 갑자옥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가게였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트렌드가 변하면서 1070년대 초반 갑자옥은 아쉽게 문을 닫은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아들이 뒤를 이어 운영하다 다른 사업으로 전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갑자옥 모자점과 고 리영희 선생이 무슨 관계가 있어 기사 제목으로 다뤘을까. 재미난 얘기가 있어 그 배경과 저간의 에피소드를 다뤄본다. 최근 전북 및 군산 언론의 산증인인 김병남 본보 회장이 '언론인이자 교수였던 고 리영희(2010년 12월 작고: 81세) 선생이 갑자옥의 사위였다'고 밝혔다. 이에 자료 찾기에 나선 결과, 고 리영희 선생의 평생동지이자 반려자였던 윤영자(1932~ ) 여사는 2012년 8월 한국기자협회와의 인터뷰에서 "군산 갑자옥 모자점의 큰딸이자 군산이 사실상의 고향"이라는 증언을 한데 따른 것이다. 윤여사는 본래 제주도가 고향이었지만 어려서 군산으로 이사와 군산여고를 졸업했고 리영희 선생과는 한국해양대학교에 다니던 리영희 선생과 만났다는 것이다. 윤여사의 집안은 본래 할아버지가 제주도 모슬포에서 한의학을 하셨고 '윤약국(윤한의원)'을 운영, 그 지역에서 매우 잘 알려진 집안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윤여사의 아버지(고 윤평숙 사장)가 가게를 연 것이 '갑자옥 모자점'이라는 것이다. 정확한 표현은 친정 쪽이 일본에서 모자기술을 배워 와서 목포, 군산, 익산, 대전, 청주 등에 갑자옥 모자점이란 체인점을 냈다는 것이다. 그러면 목포 갑자옥 모자점과의 관계가 불분명한 만큼 이에 대한 정리를 해보자. 지금도 영업 중인 전남 목포시 영해동2가 있는 갑자옥 모자점은 올해로 90년째를 맞고 있다. 갑자옥은 갑자년인 1924년 문을 열어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군산과 목포 등지에 있었던 갑자옥이 시작이 같았다는 언론보도와 자료들을 보면 상호간의 유기적인 관계, 즉 친인척들의 동업 및 협업체적인 관계가 아니었나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목포의 경우 현재의 사장 이태훈씨가 어머니 문금희(1999년 작고)여사로부터 물려받았지만 그 전에는 이씨의 외종숙(어머니의 사촌오빠)이 운영하던 것을 해방직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이씨 집안과 어머니 문씨는 본래 제주도 사람이었단다. 군산 갑자옥 모자점의 뿌리는 뭘까. 목포의 갑자옥 모자점의 주인도 고향이 제주도이고, 윤영자 여사의 집안도 제주도라는 점에서 볼 때 제주도의 같은 마을(또는 인근 마을)에 살았던 친인척 관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윤여사의 아버지는 90세가 훨씬 넘도록 장수했단다. 큰 남동생 영철씨는 캐나다로 이민한 것으로 알려졌고, 둘째 남동생 영식(72) 사장은 군산에서 거주하면서 갑자옥과 메이커 대리점 등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면 윤영자 여사와 리영희 선생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인천에 있던 해양대가 군산으로 이전하면서 운명적인 만남을 한 것이다. 리영희 선생이 해양대를 다니면서 윤 여사의 친구 언니의 집에서 하숙하면서 인연이 됐다. 윤여사가 그 집에 놀러가서 만난 것이 군에 입대한 후에도 계속돼 결혼으로 이어진 것이다. 연애시절에는 월명공원에서 데이트를 하며 사랑을 키웠다는 것이다. 한국해양대는 1947년 진해고등해원양성소(1919년 창립)와 인천해양대학과 통합한 뒤 인천으로 이전했다가 국립해양대학으로 승격됐고, 그해 5월 군산으로 이전했다. 해양대의 군산시절은 1947년 5월부터 1953년 10월까지 부산으로 이전할 때가지 6여 년 동안 계속된다. 이 때문에 지금도 '해대 건물'이란 이름으로 불리 우고 있다. 이 시기에 리영희 선생과 윤 여사가 만나 연애했고 1955년 결혼했다. 리영희 선생은 우리시대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자 큰 언론인이었다. 그의 평생은 반지성에 맞선 치열한 싸움의 역정이었다. 근무하던 언론사와 대학에서 각각 두 번씩 해직됐고, 모두 다섯 차례 구속됐다. 1980년 신군부가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 중 한명으로 그를 지목․ 투옥했을 때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리영희 선생을'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다. 군을 제대한 그는 57년 합동통신 외신부기자로 언론인의 삶을 시작했고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현장을 누볐다. 베트남 전쟁 파병 비판기사를 썼다가 조선일보에 쫓겨났고 군부독재 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했다가 합동통신에서 해직됐다.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던 76년과 80년에도 각각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의 압력으로 두 차례에 걸쳐 교수직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그는 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이사 및 논설고문을 맡았고 방북 취재를 기획했던 8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그의 무기는 관념이 아닌 사실이었고, 이론이 아닌 실천이었다. 그는 글쓰기를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라고 정의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그는 오직 진실과 균형의 날개로 이념적 도그마에 저항했다.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와 '우상과 이성'(1977년) 등은 반공이데올로기가 가린 베트남 전쟁의 실체와 중국의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내며 당대의 대표적 금서로 탄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