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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최고 유통·판매·맛 1번지

영동로에서 옛 군산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어김없이 지나야 하는 곳이 있다.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14-07-15 23:14:09 2014.07.15 23:14:09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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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행 군산지점 오거리 (신영1길, 영동로, 평화길, 약전안길, 싸전길)(상) 한국인 최초 병원 열었던 곳… 일제강점기 때 안동병원, 세창병원 등 인술 영동로에서 옛 군산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어김없이 지나야 하는 곳이 있다. 이곳은 군산시민이면 누구나 아는 '국민은행 군산지점 오거리'다. 영동상가 입구여서 영동로와 만나고, 평화로와 싸전길로 나뉘어 있을 뿐 아니라 중앙로와도 만나는 과거 군산의 유통 및 판매시설 등이 집중된 최고의 번화가였다. 어느 면으로는 그 주변에는 유흥가를 끼고 있었고 군산의 돈들이 몰리는 곳이었단다. 국민은행 군산지점은 실질적인 금융기능을 하고 있으면서 한자리에 위치한 현존 최고의 금융기관이다. 1963년 2월1일에 개점, 벌써 5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점이다. 이런 역사성 때문에 주변에는 많은 명물과 얘깃거리들이 적지 않다. 이를 테면 군산갈비의 역사와 같은 완주옥이 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세창병원, 안동병원, 옥산병원 등이 있어 의료시설이 부족했던 시대에 서민들과 민족의 애환을 담아냈던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다 최고의 미장원이라 할 수 있는 여원미용실과 가장 오래된 영신당한약방 등이 있어 군산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며 묵묵히 시민 곁을 지키고 있다. 이런 역사성 때문에 군산의 중심가로서 과거 100여 년 동안 많은 화젯거리의 중심에 있었을 뿐 아니라 각계의 인물들이 이곳에서 생활했단다. 이 때문에 어떤 이는 맛을 얘기했고 어떤 이는 경제적인 부를 일궈 성공신화를 열며 오랫동안 회자되기도 했다. 또 주변에 한국인들만 다니는 중앙초등학교가 있어 학교와 관련된 숱한 얘기들이 남아 있고, 이런 도회적인 풍토를 보면서 음악가와 학자, 영화인, 정치인 등으로도 성공한 이도 다수 있었다. 이들의 얘기를 다뤄 전설(?)을 보존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분야별로 정리해본다. 우선 지금은 사라졌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 및 50․ 60년대 인근에서 서민들의 의료와 치료를 책임졌던 병원과 그곳을 운영했던 참 의료인 등에 대한 역사를 기록해보기로 한다. 한의학의 역사를 통한 지역 의료사를 다루기는 난망한 상황이어서 서양의학과 관련된 내용을 우선적으로 정리해보기로 한다. 군산서양의료 110년사… 근대의학 선구자들 서양의학과 관련된 내용은 '사람 따라 골목길 따라 9'에서 이미 다뤄 다소 낯 익는 내용이 많다. 다시 한 번 요약한 뒤 군산의 한 시기의 의료를 담당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장을 마련했다. 군산에서 서양식 의료서비스가 첫 선을 보인 때가 1896년 4월(또는 2월 닥터 드류가 첫 진료한 시점을 기준). 이는 군산개항이 있었던 1899년 5월보다 3년이 앞선 시점이다. 의료선교사 A. D 드류(한국명 유대모:)와 W. M 젼킨(한국명 전위렴:1865~1908))이 군산진영이 있었던 수덕산 기슭의 초가를 매입, 포교소를 설립하고 의료 선교활동을 시작한 때다. 버지니아 의학부를 졸업한 드류는 1893년 결혼, 부인과 함께 한국선교에 나서 1896년 2월 군산에 들어왔다 젼킨과 합류, 본격적인 의료 선교활동을 벌인다. 이때를 서양식 의료서비스의 기원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이들 선교사들은 포교소 한쪽에 약방을 꾸며놓고 오전에는 전도를, 오후에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해 가을에 서울에 머물던 데이비스라는 여 선교사가 합류했다. 그녀는 해리슨 선교사와 1898년 결혼, 전주에서 의료 및 선교활동을 벌이다 1903년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사망했다. 1899년 개항과 함께 수덕산 일대가 일본의 조계지역으로 지정되자 큰 배가 정박하기 편리한 군산시 구암동(당시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구암산) 산기슭에 건물을 짓고 '예수'의 한자식 번역어인 '야소(耶蘇)'를 붙여 군산야소병원을 개원했다. 당시 구암리 지명이 궁멀이어서 '궁멀병원'으로도 불렸던 이 병원의 드류와 젼킨 선교사는 전도선을 타고 연안 도서지방을 순회하면서 진료와 선교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홍복근 원장이 뒤를 이어 명산동 등지에서 구암병원을 열어 그 정신을 이어갔다. # 일본인에 의한 병원 개원 붐 군산 최초의 본격 현대적인 병원은 1900년 봄 일본인 '가다끼리'가 세운 가다끼리 진찰소였다. 그는 1년 남짓 운영하다 유끼야마에게 넘겨 1901년 군산병원이란 이름으로 개원한다. 유끼야마가 1904년 2월 일본으로 돌아가자 1년 앞서 병원을 개원했던 나까야마가 이 병원을 인수합병한 뒤 영화동으로 이전, 군산병원이란 이름으로 확장해 개원했단다. 그는 1907년 민단립병원으로 개원했으나 얼마 안돼서 나까야마병원으로 개칭, 군산의료계를 재편할 정도로 입지를 굳혔다. 이밖에 붕운당병원과 사사키병원 등도 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1909년 12월 일제가 민심을 달래기 일환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도마다 1개씩 일종의 도립병원 성격의 자혜병원을 건립했고, 군산에는 1922년 세워진다. 자혜의원은 1925년 4월 군산도립의원으로 개칭됐다가 해방을 거쳐 오늘의 군산의료원으로 성장한다. 한편 군산에는 1934년 12월 기준으로 외국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 1개를 비롯한 일본인 운영 병원 8개, 조선인 병원 3곳이었단다. <세창병원이 있던 현 모습> # 일제강점기 한국인 병원들… 군산의 힙포크라테스의 후예들 군산에서 최초의 한국인 의사는 궁멀병원(구암병원) 출신 오긍선(1907~1910년 군산 근무)이었지만 최초의 개업의는 육기병(1874~1935)이었다. 육 원장은 1920년 구시장과 인접한 곳인 평화동에 옥산의원을 개원했다. 서울출신의 한학자이자 다년간 약방을 경영했던 검정의(醫) 출신이었던 그는 가정상비약 등을 주로 판매했을 뿐 아니라 일종의 양․한방서비스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원협 죽성지점 주변에 위치해 있었고, 육 원장이 한의학을 공부했던 점으로 볼 때 일반인들로부터 '옥산당'으로 불렸단다. 한국인으로 두 번째 개원한 사람은 권태영(1892~1990) 원장이었다. 서천군 한산면 출신인 권 원장은 1921년 옛 영동파출소에서 국민은행 군산지점 인근 신영동에 군산최초(한국인)의 서양병원인 안동병원을 개원했다. 그의 본관인 '안동'이란 이름을 빌려 안동병원을 개원한 자녀들이나 사업적으로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큰아들인 영복은 주조장 등을 경영하며 사업적으로 성공했지만 1945년 11월30일 경마장 폭발사건 순직했고 2남 영준은 동경소재 동양미술전문대를 졸업했단다. 3남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뒤 서울대 의대교수로 근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딸 영희씨는 당시로선 드물게 군산여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할 정도로 재원이었단다. 하지만 권 원장은 1950년대 불행한 가정사와 사업에 실패한 뒤 군산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다 작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권 원장의 큰아들 영복씨는 경마장 사고로 순직했지만 3남을 낳았고 그 중 둘째 아들은 공직에서 1990년대 초반 은퇴했던 것으로 군산시청 후배들은 기억하고 있다. 중앙로 2가의 세창병원을 개원한 강세형 원장은 1920년대 초반에 개업한 이래 1970년까지 반세기동안 병원을 운영하며, 인술을 베풀어 나이든 지역민들로부터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있을 정도다. 아직까지 당시 병원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 병원건물은 막내아들 창희씨가 평생을 지키며 살고 있다. 아들 창희씨는 “어렸을 때 아버님(강원장)은 어려운 환자들을 마다하지 않았고 환자들이 밤늦게라도 문을 두드리면 왕진을 가는 등 인술을 베풀었다“고 기억했다. 이밖에도 동화병원(원장 이도준) 등도 당시 서양의술을 통해 지역민들을 치료했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를 넘어서 초창기 서양병원들의 후예들이 100여년을 넘기며 전통의학인 한의학을 넘어서 입지를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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